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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심리기사/인지심리 칼럼

인간은 현상이 영원하다고 믿을까?



글: 인지심리 매니아

어느 날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한 여학생을 발견했다. 무심코 지나쳐서 신호등을 건넌 다음 10분쯤 더 달리다가,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해서 방향을 돌렸다. 좀전에 지나쳤던 신호등에 다시 도착했을 때 여학생은 사라지고 없었다.

텅빈 정류장을 지나치면서 갑자기 묘한 느낌을 받았다. 짧은 시간이 경과했을 뿐인데 방금 전 정류장에 서 있던 사람이 사라지고 없다. 너무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느낌을 받은 이유는 현상의 변화무쌍함 때문이었다. 시간이라는 태엽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변화하거나 소멸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위를 둘러싼 환경은 그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이 없다. 우리는 영화 '큐브'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처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계속 변화하며 늙는다고 설명했다.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은 아닛짜(무상)라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둑카(고, 苦)에 싫어함을 갖나니

오직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 법구경 277 -


사람들은 현상이 무상함을 알지 못하고 영원하다고 착각함으로써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사실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말 '무상'이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할까? 정말 만물이 영원하다고 생각할까?

만약 사람들이 현상을 영구적이라고 믿는다면, 현상이 출현해서 소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할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가설을 검증코자 성균관대 인지심리학 동아리 '심리학의 꽃' 학생들과 페이스북 인맥들에게 짧은 설문지를 배포하는 엉터리 실험을 진행했다.

설문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 철근 콘크리트 건물 수명

2. 음식점의 평균 수명

3. 푸들의 평균 수명

4. 중소제조업의 평균 수명

5. 대기업의 평균 수명

6. 직장인의 평균 이직 주기

7. 결혼 후 이혼까지의 평균 동거 년수


만약 사람들이 현상을 영구적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면, 현상의 지속기간을 과대평가할 것이다. 따라서 참가자의 응답은 정답에서 +방향으로 벗어난 분포를 보일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작성한 설문지를 회수한 다음, 분석을 위해 각 문항의 편차 점수(응답-정답)를 구하고 One-sample t 검증(검증값=0)을 해 봤다. 문항별 분석 결과는 아래와 같다.



  N
편차 평균
표준 편차
t
 유의확률
 콘크리트 건물
 12  -8.0833  18.54948  -1.51  .159
 음식점  11  2.1364  2.0505  3.456  .006
 푸들  13  -2.2308  3.56263  -2.258  .043
 중소기업  12  -2.8833  5.24765  -1.903  .083
 대기업  12  2.15  14.47961  .514  .617
 이직주기  12  2.25  1.71226  4.552  .001
 결혼~이혼  12  -1.8333  11.59807  -.548  .595



평균 0에서 벗어나 있는 문항은 3개 문항이었으며, 그 중 두 문항의 편차 점수가 양수였다. 결국 음식점과 이직주기를 제외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정답을 잘 맞췄거나 오히려 과소평가했다.

그 다음 문항간 분석을 위해 각 문항의 편차 평균을 대상으로 T-test를 실시했다. 그 결과 평균은 -1.21, t=-.848, p=.429였다. 즉, 전체 문항들을 분석했을 때도 편차는 0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즉, 사람들의 응답이 대체적으로 정답에 근접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상의 지속기간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실험에 몇 가지 문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먼저, 가설이 논리적으로 타당한지 의문이다. 두번째로, '현상'이라는 개념이 워낙 광범위해서 실험에 사용한 문항만으로 포착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는 실험법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의 반응을 단순히 기술했다는 한계가 있다.

실험 결과를 놓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쩌면 부처의 말처럼 우리는 무상이라는 개념에 무지할지 모르고, 이렇게 간단한 설문지만으로는 그런 무지를 포착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누군가 좀 더 정교한 실험을 한다면,  '무상'이라는 깨달음을 방해하는 인지적 편향이 우리 안에 있음을 발견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