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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심리기사/인지심리 칼럼

인지심리학적 원리에 기반한 단어 암기법 만들기




글 : 인지심리 매니아



얼마 전부터 지인의 부탁으로 고 2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게 되었다. 이 학생은 수학은 잘 하지만 영어를 못해서 고민이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하기 위해 학생의 독해 방식을 유심히 관찰하던 중, 모르는 영어 단어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넌 단어를 어떻게 외우니?” 그 학생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그냥 단어를 입으로 수없이 반복하면서 외운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학생에게 단순 반복은 암기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단순 반복은 그야말로 ‘최악'의 단어 암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특정 단어나 숫자를 입으로 반복(인지심리학에서는 시연, rehearsal이라고 한다)하면, 해당 정보는 작업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유지된다. 지금부터 ‘48932375’라는 숫자를 입으로 반복해보면 이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입으로 계속 ‘사팔구삼이삼칠오'라고 중얼거리는 동안은 숫자를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도 이런 이유 때문에 단순 반복이 정보를 기억하는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당신이 일주일 뒤에도 이 숫자를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아니, 지금 이 문장을 읽는 동안 이미 숫자를 까먹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맞다. 단순 반복 만으로는 정보가 장기 기억에 저장된다고 보장할 수 없다. 정보가 장기 기억에 통합되기 위해선 다른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48932375를 새하얗게 잊어버린 것처럼, 단순 반복 전략을 쓴 학생들도 자신이 외운 영단어를 금세 잊어버리게 된다. 



그 날 이후로 어떻게 하면 이 학생이 단어를 쉽게 외울 수 있을지 궁리한 끝에, 필자는 조금 독특하지만 효과적인 단어 암기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암기법을 ‘단어 퍼즐'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암기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외우고자 하는 영 단어를 죽 나열한다. 그 다음, 나열한 단어를 모두 사용하여 짧은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예)

1. 외우고자 하는 단어를 나열한다

Determine comfort consume object impress available contain diet recognize material


2. 각 단어를 모두 사용하여 짧은 이야기를 만든다.

Recently, FDA Determined some diet foods are not safe. These diet foods which are available to buy on the internet contain harmful material. The medicines company recognized that their products contains morphine, so make consumers comfortable temporarily. Doctors also objected to using these diet foods.



처음에는 이 암기법이 효과가 있을지 반신 반의했다. 그런데, 이렇게 작문 숙제를 내주자 학생의 단어 재인률이 높아졌다. 더 신기한 건 학생 뿐 아니라 선생인 필자 역시 수 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작문 내용과 단어를 잘 기억한다는 점이다. 학생 뿐만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던 선생님도 단어를 모두 외운 것이다. 


이 암기법은 사실 인지심리학 이론를 토대로 만든 것이다. 우선, 필자는 정보가 장기기억에 통합되거나 인출될 때 유리하게 작용하는 과정들을 모두 열거해 봤다. 그리고 그 중 정교화, 부호화 특수성, 도식, Salience라는 요인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암기법을 만들었다.


첫째, 이 암기법은 정교화(Elaboration)를 활용한다. 정교화란 주어진 정보 이외에 부가적으로 연결되는 명제를 생성하는 과정을 말한다. 주어진 단어로 문장을 만들면, 단어가 스토리의 문장(명제)과 연합된다. 단어에 수많은 명제가 연결되면, 나중에 기억을 인출할 단서가 풍부해진다. 즉, 이야기의 문장 또는 함께 쓰인 단어(인출 단서) 중 하나만 기억하더라도, 이와 연결된 해당 단어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둘째, 이 암기법은 부호화 특수성 원리에 충실하다. 부호화 특수성은 기억 과정과 인출 과정이 유사할 때 기억이 잘 떠오른다는 원리다. 단순 반복의 경우 단어의 소리를 반복하기 때문에, 단어의 발음을 기억해보라고 하면 기억이 잘 날지는 모르나 단어의 ‘뜻'은 기억이 안 나기 쉽다. 반면, 이 암기법은 작문 과정에서 단어의 의미를 끊임없이 떠올려야 하기 때문에 나중에 다른 지문에서 단어가 출현할 경우 뜻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셋째, 이 암기법은 도식을 활용한다. 도식은 사건 등을 표상하는 지식의 덩어리다. 우리는 흔히 ‘흥부와 놀부’하면 주걱과 박을 떠올린다. 주걱과 박은 ‘흥부와 놀부'라는 스토리(도식)의 일부분을 이루기 때문에, 이야기 제목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다. 앞서 살펴봤지만, 이 암기법을 통해 외운 단어들은 학생이 만들어 낸 ‘스토리'에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일단  자신의 이야기를 회상할 경우, 단어들이 실타래 따라오듯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암기법은 Salience를 활용한다. 주어진 단어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만들려면, 스토리가 다소 엉뚱하거나 창의적인 방식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기억은 도식에 맞지 않거나 이상한 정보에 민감하다. 따라서 기발하거나 창의적인 스토리는 단어의 기억이 지속되도록 도와준다.


그 외에도 이 암기법은 깊이 처리 이론, 최근 대두 되고 있는 '스토리텔링'의 힘을 빌린다는 점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지만 단점도 있다. 일단 학생에게 영어 작문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에게 단어를 주고 작문을 해 보라고 하면 대부분 어려워할 것이다. 특히, 영어 실력이 부족한 중학생의 경우 실효성이 적을 수 있다.


또, 이 암기법으로 단어를 암기한 후에도 해당 단어를 다양한 지문에서 다시 접해봐야 한다. 단어는 맥락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지문에서 나올 경우 전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고, 따라서 뜻이 쉽게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암기 후에도 다양한 지문을 읽으면서 단어를 여러 번 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