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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심리기사/의사결정/추론

글씨가 예쁘면 벌도 덜 받는다?

Posted by 인지심리학 매니아




당신이 판사라고 가정하자. 사건 기록을 읽으려고 하는데 글씨가 너무 희미해서 잘 읽을 수가 없다. 한참을 봐도 글씨가 희미해서 사실관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제 다른 사건 기록을 읽는다. 이번에는 글씨가 선명하고 읽기가 수월하다.

글씨가 선명했던 사건기록의 피고인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형량을 덜 받을까? 정답을 맞춰보라.


정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1. Processing fluency
사 람이 어떤 정보를 처리하면서 '이해하기 쉽다' 또는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느끼는 것을 Processing fluency라고 한다. 즉, 인지적 처리과정에 대해 느끼는 주관적 난이도를 말한다. 공부를 하는데 책이 너무 어려우면 그 책은 disfluent한 책이고, 쉽다면 fluent한 책이다.

정보처리가 용이한 정보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 쉽다(Hedonic marking hypothesis). 복잡한 내용을 쉽게 설명해 놓은 책이 호감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또 Naive theory에 의하면 쉽게 처리되는 내용은 친숙하거나 진실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보통 두번 본 책은 한 번 본 책보다 이해가 쉽다. 친숙하기 때문에 이해가 쉬운 것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무언가를 발견하면 그 이유는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이 Processing fluency가 도덕적 판단과 무슨 상관 있을까? Hedonic marking 가설에 의하면 쉽게 처리되는 정보는 비난을 덜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해하기 쉬운 사건기록의 피고인은 형량을 가볍게 받을 것이다.
이 논문의 연구자들은 이것 외에도 fluency가 불일치하는 경우(Discrepant fluency)가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판단했다. 지저분하게 씌여진 사건기록만 보다가 깨끗하게 씌여진 기록을 봤을 때, 그 피고인에게 가벼운 형량을 주기 쉽다는 것이다. 즉, 일종의 대비효과인 셈이다.

이 두 가설이 과연 맞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2. 실험
실험 참가자들은 6개의 이야기를 순서대로 읽게 된다. 참가자들에게 나눠주는 유인물에는 Punch 스토리(다른 사람을 주먹으로 때리다), Flag 스토리(교사가 국기를 불태우다) 등 비도덕적 행동을 적혀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이야기가 적힌 종이의 음영을 조절해서 글씨가 잘 안 보이게 해 놨다. 다른 경우는 글씨가 선명하게 조작했다. Perceptual fluency를 조작한 것이다.



참가자 1에게 나눠준 유인물의 스토리 순서
Punch
Flag
Deface
Dog
 Hitler Kiss
참가자 2의 경우
 Punch Flag
Deface
Dog
Hitler
Kiss
(회색 음영: 글씨가 잘 안 보이는 경우)

실험 결과 글씨가 잘 보이는 경우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비난이 감소했다. Hedonic marking 가설이 지지된 것이다. 또 4번 스토리(특히 글씨가 잘 안 보이다가 갑자기 잘 보이는 경우; 참가자 2)의 경우 비난이 현저히 감소했다. 이는 Discrepant fluency가 지지된 것이다. 일종의 대비효과로 인해, 글씨가 잘 보이는 경우 비난을 덜 받게 된 것이다.






3. 논의
인 간의 도덕적 판단에 대해 기존 학설은 인간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해 왔다. 글씨를 잘 썼는지, 내용이 기분 나쁜지 등 기타 요인은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이므로 오로지 내용의 객관적 사실만을 근거로 도덕적 판단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Haidt가 인간의 도덕적 판단이 직관에 의존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도덕적 판단은 합리적이라기 보다는 직관적이며, 내용 외에 다른 요인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물리적 지각이 수월한지 여부가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합리적 의사결정에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이 논문은 물리적 지각만을 다루었다. 그러나 conceptual fluency의 경우도 이와 동일할까? '내용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정보가 긍정적 평가를 받을까? 추후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파출소에 가서 사건 경위서를 쓸 때는 최대한 또박또박, 알아보기 쉽게 써야 한다. 또 내용도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할지 모른다(만약 conceptual fluency도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면).


Simon M. Laham et al, Easy on the mind, easy on the wrongdoer: Discrepantly fluent violations
are deemed less morally wrong, Cognition,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