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로 가든 중간만 가면 된다


- 우리 아버지



글 : 인지심리 매니아


필자는 고등학생 시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읽은 적이 있다. 책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덕목이 넘침과 모자람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나이 어린 필자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덕목이란 넘칠수록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즐거움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도덕적 이상을 쫓을수록, 더 많이 배울수록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력에 감탄하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 학식이 타인보다 뛰어난 사람이 더 행복한 것도 아니고, 부자가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즐거움이 지나쳐서 스스로를 망치는 사람도 있었고, 지나치게 착하거나 영리해서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었다. 바람직한 덕목일지라도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아담 그랜트(Adam Grant)와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2011년에 발표한 논문[각주:1]에서 덕목(Virtue)이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비단조적(nonmonotonic)’ 패턴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돈이 행복에 미치는 효과가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성실성 같은 덕목도 동일한 법칙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다. 저자들은 일반인 뿐만 아니라 긍정심리학자들마저 가치있게 여기는 덕목들이 각각 어떤 부작용을 갖고 있는지 나열하고 있다.


지식의 해로움

지식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저자들이 인용한 한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각 기업의 관리팀이 받는 학습 오리엔테이션의 정도와 직무 수행의 관계를 연구했다. 그 결과, 지나치게 집중적인 학습 오리엔테이션의 경우 직무 수행과 부적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비단 기업에서만 이런 부작용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이 많은 학자는 일반인보다 문제를 더 잘 해결하고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까? Tetlock에 의하면, 개방성과 인지적 유연성이 뛰어난 사람은 미래를 예측할 때 발생 확률이 낮은 결과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또,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문제 해결 시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용기(성실성)의 해로움

용기(Courage)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용기와 일맥상통하는 강점 중 하나인 ‘연습(practice)’(저자의 분류에 따르면)을 예로 들어 보자. 연습은 많이 할수록 좋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Langer 등의 연구에 의하면 지나친 연습은 유연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기술 향상을 위한 효율적 방법을 터득하기 힘들 수도 있다.

용기의 또 다른 강점인 ‘성실성(conscientiousness)'도 마찬가지다. 성실성이 지나치면 세부적인 사항에 지나치게 몰두할 위험이 있고, 적절한 시기(예, 노력해도 목표를 이룰 수 없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을 때)에 목표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인간미의 해로움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도 지나치면 좋지 않다. Windsor 등(2008)의 연구에 의하면 자원봉사 시간이 연간 800시간을 초과할 경우 삶의 만족도가 줄어들 수 있다. 저자들은 긴 봉사 시간이 본인에게 짐이 되거나, 봉사 활동으로 인해 다른 의미 있는 일에 투자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추측한다.

공감(Empathy) 능력이 높은 사람은 행복할까? 공감 능력이 지나치면 큰 스트레스를 겪기 쉽고 오히려 친사회적 행동을 할 확률이 줄어든다(Eisenberg, 2000). 타인의 고통에 지나치게 공감하는 사람의 일상을 상상해 보면, 이런 부작용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충성심의 해로움

자기가 속한 집단에 협조하려는 마음도 지나치면 좋지 않다. ‘충성심(Loyalty)’을 예로 들어보자. 충성심이 지나친 직장인들은 조직의 비윤리적인 관행을 묵살하기 쉽다. 또 지나치게 충성스러운 조직은 조직 내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발전에 도움이 되는 갈등조차 피하려고 한다. 



원인

수많은 윤리가와 일반인들이 칭송하던 덕목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이유는 뭘까? 저자는 각 덕목이 비단조적 효과를 갖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덕목 간 충돌

첫 번째 원인은 서로 독립적인 덕목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존 관습을 지키려는 보수성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개방성은 각각 독립적인 덕목이며, 각 덕목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결국 한 가지 덕목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이 덕목과 상충되는 다른 덕목을 지킬 수 없게 되면서 행복 등의 지표가 하강하게 되는 것이다.


긍/부정 효과의 크기와 범위의 차이

두 번째 원인은 한 가지 덕목이 가져오는 긍정과 부정적인 효과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식사량과 즐거움에 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초반에는 식사량에 비례해서 즐거움도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배가 부르기 시작하면 즐거움이 증가하는 속도는 줄어든다. 반면 배가 부르기 시작하면서 느끼는 더부룩함 등 불쾌함은 빠른 속도로 증가한다. 따라서 두 긍-부정적 효과의 합은 비단조적 곡선(특히 뒤집어진 U자 곡선)의 형태를 띄게 된다. (아래 그림은 의사결정 시 대안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이득과 손실이 각각 다른 형태의 곡선을 그리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의사결정의 만족감(이득+손해)은 뒤집어진 U자 곡선 형태를 띄게 된다)


사진 : 논문에서 인용




단일한 비단조적 효과

세 번째 원인은 덕목 자체가 비단조적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 위협(stereotype threat) 연구를 예로 들어보자. 연구자들은 남녀 참가자를 대상으로 고정관념 위협(여자는 수학을 못한다)을 일으킨 다음 수학 문제를 풀게 했다. 실험 결과 고정관념 위협을 받은 여성 참가자는 쉬운 문제를 잘 푼 반면 어려운 문제를 잘 풀지 못했다. 과제 수행에 대한 동기가 상승하면(여성들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 문제를 잘 풀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노력도 증가하지만 주의력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는 상대적으로 잘 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는 관찰 변인인 '주의력의 폭' 자체가 비단조적 패턴을 보이는 경우며, 위와 같은 현상이 덕목 간 충돌이나 긍부정 효과의 크기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시중 서점에 진열된 책이나 매년 쏟아져 나오는 심리학 논문들은 한 가지 덕목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조언을 믿고 그 덕목만을 지나치게 고집하면 부정적인 결말을 맞을 수도 있다. 어쩌면 ‘중용'이라는 단어는 지나쳐도 부작용이 없는 유일한 덕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1. Grant, A. M., & Schwartz, B. (2011). Too Much of a Good Thing The Challenge and Opportunity of the Inverted U. Perspectives on Psychological Science, 6(1), 61-76. [본문으로]


2013.4.20 토요인지모임. 장소: 서강대 정하상관. 발표자: 김정한 작가님. 사진: 인지심리 매니아.



글 : 인지심리 매니아


2013년 4월 20일 서강대에서 열린 토인모에 다녀왔다. 이번 모임은 ‘인지과학과 시각예술’이라는 주제로 미디어 아티스트인 김정한 작가님이 발표를 맡아주셨다.


김정한 작가님은 인지 과학을 공부하기 전부터 인간의 지각-인지를 예술 작품과 연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한 대상이 다른 대상의 경험을 왜곡없이 경험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작가님의 문제 의식은 세미나를 통해 제시한 작품에서 엿볼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제시한 작품인 ‘Acrophobia(고소공포증)”는 타워크레인 기사의 머리에 부착된 카메라를 통해 비춰진 세상을 보여준다. 크레인에서 작업하는 사람의 고소 공포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두 번째 작품은 동물의 지각을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 설치 작품은 새가 바라보는 세상을 인간이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필자는 새가 경험하는 세상이 우리의 세상과 어떻게 다를지 상상하면서 작품을 감상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새가 된 기분이었다.


그 외에도 대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동자 움직임을 추적한 작품 등 다양한 작품이 소개되었다. 무엇보다 주목을 끈 것은 인지 과학을 공부한 이후 제작한 작품인 ‘도시의 마음'이었다. 이 작품은 도시를 관통하는 데이터의 흐름을 Bio information + 빅데이터로 표현했다. 각각의 키워드들을 뉴런망 형태로 표현하고, 키워드들의 정서에 따라 신경망의 색상이 결정되는 기발한 작품이었다. 소셜 데이터를 시각화하거나  감성 분석을 시도하는 기업에게도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작품명 : 도시의 마음. 김정한 작



발표 내용을 통틀어, 작가님이 풀고자 하는 문제는 바로 ‘감각질(Qualia)’이었다. 위키피디아 정의에 의하면, 감각질은 ‘어떤 것을 지각하면서 느끼게 되는 기분이나 심상’을 의미한다. 감각질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일인칭 시점이기에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관찰이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위 정의처럼 감각질은 어떤 대상의 주관적 경험이기 때문에 다른 대상이 공유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박쥐가 소리를 어떻게 ‘보는지’ 체험할 수 없다. 우리는 돌고래가 고주파음을 어떻게 듣는지 체험할 수 없다. 심지어 인간 간에도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적녹 색맹인 사람이 보는 빨강과 녹색을 우리가 그대로 체험할 수 있을까?


비록 완벽하진 않았지만 다른 대상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했던 작가님의 시도는 매우 훌륭하다. 비단 예술 분야 뿐만 아니라 인지 과학에서도 이런 시도가 활발해졌으면 좋겠다. 만약 인지 과학이 주관적 경험을 공유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면, 폴 블룸의 주장[각주:1]처럼 어린 시절부터 ‘유아론'에 빠져있는 인간의 제한된 인식도 보다 확장되지 않을까?



필자는 세미나 후 식사 자리에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를 떠올려 봤다.


1. 학부생들을 위한 멘토링

토인모에 참석하는 학부생 중 상당수가 인지 과학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인지심리학, 신경과학, HCI, UX 등을 공부할 수 있는 관련 대학원, 입학 절차, 커리큘럼 등을 알려줄 멘토가 필요하다. 필자가 식사 자리에서 조언을 많이 해 주고 있지만, 보다 내공이 높으신 분들이 학부생들을 지도해 준다면 인지 과학 후학 양성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2. 학문 - 기업 간 연계

토인모에 참석한 기업 관계자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인지 과학이 기업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례를 종종 발견한다. 그러나 세미나 후 점심 시간만으로는 보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Collaboration을 하기에 부족한 감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별도의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기업 종사자분들과 관심 분야를 공유하거나 연구를 진행할 계획을 갖고 있다.


토인모는 매월 셋째주 토요일날 서강대에서 열린다. 다음 모임은 5월 25일 서강대 정하상관(J) 302호에서 열리는 ‘한국인지과학회'로 대체된다.

  1. Bloom, Paul. "The Moral Life of Babies". New York Times Magazine May 2010: 44-65. [본문으로]



2013.3.16 토요인지모임. 장소: 서강대 정하상관. 발표자: 박도영 책임님. 사진: 인지심리 매니아.





글 : 인지심리 매니아


2013년 3월 16일 서강대에서 열린 토인모 다녀왔다. 이번 모임은 ‘Auditory Interface Design for Product’라는 주제로 박도영 책임연구원(현대기아자동차 기술연구소)님이 발표를 맡아주셨다.


최근 UX 분야는 시각 뿐만 아니라 청각적 UI에도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정보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세미나에 참석하신 것 같다. 인지심리와 음악을 함께 공부한 필자도 누구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다.


세미나의 초점은 Sonification의 개념과 디자인 과정에 맞추어졌다. 위키피디아 정의에 의하면, Sonification은 ‘정보 전달 또는 데이터를 지각하기 위한 비언어적인 소리의 활용'를 의미한다. 즉, 말을 하지 않고도 소리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거나 데이터를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박도영 책임님은 Sonification이 세 가지 과정으로 구분된다고 설명했다. ‘Rendering sound’는 시급성(Urgency)과 중요성(Importance)을 소리의 특성(음높이, 음색, 음량)에 매핑하는 단계다. 예를 들어, 필자의 아버지가 소유한 승용차는 후진 시 물체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경고음의 비트수가 점점 증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정지해야 한다는 시급성이 높아지면 비트도 함께 증가하도록 매핑된 경우다.


두번째로, 발생한 소리가 청자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단계다. 소리는 정보(피드백, 알림, 회사 브랜드, 엔터테이닝)나 심미(아름다움, 즐거움, 감동이나 인상, 차별화)를 전달할 수 있다.


세번째로, 청자가 소리를 듣고 정보나 미적 가치를 ‘이해’하는 단계다. 만약 청자가 정보를 올바로 이해했다면 Sonification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세미나는 auditory interface를 활용한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했다. 또, 도형을 음으로 표현하는 재미난 실험을 즉석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건반을 보면 눌러야 직성이 풀리는 필자가 제일 먼저 나섰는데, 다른 분들도 필자의 소리에 공감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세미나를 듣는 동안, 필자는 발표 주제와 관련된 인지심리학 이론이나 연구들을 떠올려봤다. 그리고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우선, 소리가 추상적인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우리는 단순한 소리가 정보가를 가질 수 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면 ‘위급’한 상황이라는 사실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소리가 그보다 훨씬 복잡하거나 추상적인 개념을 전달할 수 있을까? 가령, 소리가 동물이나 물체를 표현할 수 있을까?


소리의 경우는 아니지만, ‘음악'이 사물을 전달할 수 있는지 연구한 사례가 있다. ‘Cognitive Daily’라는 블로그의 저자이자 인지심리학자인 Dave Munger는 블로그를 통해 재미있는 실험을 진행했었다. 블로그 독자들을 대상으로 클래식 곡(바람이나 바다처럼 특정 대상을 주제로 하고 있다)들의 일부를 들려준 다음, 곡들이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물어본 것이다. 이 때 응답자는 ‘아름답다' 등의 형용사를 쓸 수 없으며 ‘강'처럼 구체적인 명사를 이용하여 응답을 해야 한다.


연구자는 응답자가 주제를 정확히 맞추었을 경우 2점, 주제와 유사한 사물을 언급한 경우 1점, 전혀 다른 사물을 언급한 경우 0점을 부여했다. 예를 들어 동물의 사육제 중 ‘코끼리를 들은 사람이 ‘코끼리’라고 대답하면 2점, ‘하마'라고 대답하면 1점, ‘새'라고 대답했으면 0점을 받는다.


그런데 실험 결과 응답자의 스코어는 전반적으로 낮았다. 아래 그래프는 네티즌들의 응답 결과다.



Image : Cogitive Daily



그래프에서 알 수 있듯이, 음악 전공자들의 평균마저 1점을 넘지 못했다. 참가자 대부분 주제와 관련 없는 사물을 지칭한 것이다. 이 온라인 실험 결과에 대해선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 가능성은 생상스가 코끼리에 해당하는 음악을 제대로 매핑하지 못한 경우다. 이 경우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 하지만 애시당초 음악이 코끼리같은 복잡한 개념을 표현할 수 없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음악이 전달하는 정보의 복잡성에는 한계가 있는 셈이다. 이 결과가 소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까? 소리는 어느 수준의 복잡성까지 표현할 수 있을까? 소리가 도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색깔은? 코끼리는? 


둘째로, 소리에 대한 선호도 조사가 매번 실패로 끝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심리학 문헌에서도 이와 비슷한 연구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런 실험은 독립 변인 외에도 수많은 변수들이 개입(혼입)할 여지가 있다. 한 연구의 경우 온라인을 통해 음악 투표를 실시했는데, 참가자들이 투표 초반 많은 표를 받은 음악에 몰표를 주면서 특정 음악이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음악의 특성보다 곡에 대한 타인의 반응이 자신의 선호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 외에도 음악의 제시 순서, 환경 등에 따라 실험 결과는 무수히 달라질 수 있다. auditory interface를 개발하기 위한 서베이가 전체 사용자의 의견을 예측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필자는 세미나 후에 이어진 식사 시간에서 발표자 및 현업에 종사하시는 분들과 이런 고민들을 함께 나누어봤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음악이라는 분야에 과학적 검증을 거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모한 시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청각적 UI 설계의 과학적 검증을 회의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UX는 디자이너의 인사이트와 과학이 어우러지는 분야다. 때로 이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한다. 마치 우리 뇌의 System 1과 System 2가 갈등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디자이너의 인사이트는 빠른 시간에 유저들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반면 서베이나 실험 등 과학적 검증은 느리지만 인사이트가 저지르는 오류를 바로잡아줄 수 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것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 두 가지 방법을 잘 조화시킬 때 사용자의 경험도 최적화될 것이다.



끝으로, 필자의 블로그를 보고 토인모를 찾는 분들에게 항상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필자가 토인모의 부흥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토인모는 매달 세번째 주 서강대에서 열린다. 누구나 무료로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부담 없이 방문해도 괜찮을 것 같다.

2013.2.16 토요인지모임. 장소: 서강대 정하상관. 발표자: 배문정 교수님 사진: 인지심리 매니아



글 : 인지심리 매니아


2013년 2월 16일 서강대에서 열린 토인모에 다녀왔다. 이번 모임은 ‘체화된 인지의 문명사적 의의’이라는 주제로 우석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님인 배문정 교수님이 발표를 맡아주셨다.


인지 과학이 문명사에 미칠 영향은 좁은 학문 영역을 공부한 필자에게 있어서 대단히 큰 담론이다. 이렇게 큰 주제를 작은 그릇에 담기가 쉽지 않았지만, 배문정 교수님이 강의를 재미있게 풀어주셨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들은 내용을 스스로 정리하는 차원에서 아래에 강의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인간의 문명은 르네상스를 계기로 큰 성장을 거두었다. 이 시대의 철학자들이 선도한 ‘제 1의 계몽'은 인간 인식의 확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인식은 현상과 거리를 둔 체 관찰자의 입장에서 본 지식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또 이 시대의 도덕은 개인에게 부여하는 ‘정언 명령'으로써 강제성을 띄고 있었다. 상호작용 측면에 있어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기계 문명의 접촉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시대였다.


그러나 이런 토대를 바탕으로 성장한 문명은 한계에 봉착했다. 우리 인간 문명은 아직 불완전하며, 개개인의 삶은 여전히 위태롭다. 우리는 이 문명을 계속 발전시킬지, 또는 수정을 가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배문정 교수님은 현대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문명의 수정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제 2의 계몽'이 필요하다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제 2의 계몽을 위해서 인지 과학이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제시해 주셨다. 우선, 인식의 측면에서는 ‘체화된 인지'를 통해 앎의 개념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체화된 인지는 입력과 출력의 구분이 없으며, 인식과 체험을 구분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역동적인 ‘앎'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삶이 곧 앎인 것이다.


또, 도덕 대신 ‘윤리의 계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하셨다. 윤리는 개인에게 주어진 정언명령과 달리 자발적 성격을 띠고 있다. 윤리는 즐거워야 한다. 우리 모두가 윤리에 즐겁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 새로운 문명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제 2의 계몽은 하나의 큰 전제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 전제는 바로  ‘we’라는 개념이다. 삶=앎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즉 사랑과 공감의 다른 표현이다. 윤리의 실천 역시 마찬가지다. 윤리의 자발적 참여는 우리라는 틀 안에서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강의를 들으면서 역사 속 ‘우리’라는 개념이 희미해졌다가 회복되는 과정을 되짚어봤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로버트 퍼트넘은 ‘나 홀로 볼링'이라는 저서에서 산업화와 급속한 사회 변화로 사회적 자본이 파괴되는 현상을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설명했다. 저자는 법률, 제도 등 다른 수단이 사회적 자본을 대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막대한 비용이 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개인화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지적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제 1의 계몽'이 낳은 부작용은 아닐까?



나 홀로 볼링

저자
로버트 D. 퍼트넘 지음
출판사
페이퍼로드 | 2009-03-06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볼링을 치는 사람은 더욱 늘고 있지만 리그 볼링에 가입하는 사람...
가격비교



사회적 자본은 자발적이고, 공동체적이고, 비용면에서도 저렴하며, 현대 문명이 겪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사회적 자본은 인간과 인간 간 역동적인 상호작용(이것이 곧 체화된 인지의 앎이 아닐까?)을 필요로 하며, 결국 ‘우리'라는 개념으로 수렴한다. 필자는 강의를 듣는 내내 ‘윤리적 계몽'을 통한 문명의 수정이 ‘사회적 자본'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비록 정치 학자와 인지 과학자가 다른 용어와 다른 Scope에서 현상을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의 회복이라는 대 주제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모임이 끝나고 점심 식사를 하는 동안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필자는 이 모임에 올 때마다 학문적 갈망에 목을 축일 수 있어서 기쁘다. 이질적인 학문 간의 조우는 필자의 학문적 식견을 넓혀주고 스스로 성장하게 만드는 것 같다. 

더불어서, 필자의 부족한 블로그를 애독하시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도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토요인지모임은 매달 1번씩 정기 모임을 가진다. 3월 모임 역시 서강대에서 열릴 예정이다. 



2013.1.19 토요인지모임. 장소: 서강대 정하상관. 발표자: 윤홍옥 박사 사진: 인지심리 매니아



글 : 인지심리 매니아


오랜 망설임 끝에 마침내 토인모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번 모임은 서강대학교에서 개최되었으며,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인 윤홍옥 박사님이 발표를 맡았다. 발표 제목은 ‘예측성과 유사성이 문장 처리에 끼치는 영향’이었다.


언어 연구는 통제해야 할 factor가 많기 때문에 실험 설계가 까다롭고 이론도 복잡하다. 또 필자의 전공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연구 내용을 모두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이해한 내용과 개인적으로 얻은 교훈을 적고자 한다.


인간의 언어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말이 체 끝나기도 전에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다. 이 놀라운 능력에는 무수히 많은 요인들이 관여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 발표는 문장을 통해 활성화된 후보 단어들(cohort) 간의 의미적 유사성, 문맥적 제약, Timing이 단어 예측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다뤘다. 


필자의 관심을 끈 대목은 문맥적 제약의 효과였다. 문맥적 제약이 강한 조건에서는 target 단어의 활성화가 강해진다. 하지만 문맥적 제약이 약할 경우 (target 단어를 포함한) cohort 내 단어들은 비슷한 활성화 수준을 가진다는 것이다(필자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


이 결과는 영어 교육에 큰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2014년 수능 영어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은 바로 ‘빈칸' 추론이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빈칸 추론을 두려워한다. 필자가 가르치는 학생 한 명도 빈칸 추론에 유독 약하다. 이런 학생들은 보통 ‘문맥'을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어쩌면 학생들의 뇌에서  보기로 제시된 단어들의 활성화 수준은 모두 비슷할지 모른다. 해당 문장의 문맥, 또는 글 전체 문맥의 제약을 통해 정답을 골라내지 못한다면 빈칸 추론하기 문제는 고역이 될 것이다. 영어 교육에 있어서 학생들에게 ‘화용적 의미'의 활용을 가르치는 것은 단어나 문법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일지 모른다.  


필자는 발표를 듣는 동안 이따금씩 이정모 교수님이 앉아 계시는 모습을 지켜봤다. 만약에 교수님이 없었더라면 이런 값진 모임이 계속 유지될 수 있었을까? 지난 수십 년 동안 인지과학 발전을 위해 공헌하고 계신 교수님을  보면서, 후학 양성은 위대한 스승의 지도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순간, 모교인 성균관대의 인지심리 동아리 후배들이 떠올랐다. 필자 역시 교수님처럼 후배들을 지도하는 데 도움을 주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기회가 된다면, 후배들을 지도하는 일을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발표가 끝나고 참석한 사람들끼리 점심을 먹으면서 분위기는 보다 화기애애해졌다. 참으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임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의 이색적인 전공과 이력을 접하면서 이 모임이 참 매력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필자가 인지과학을 접하고 처음 받았던 느낌과 묘하게 닮은 느낌이었다.


토요인지모임은 매달 1번씩 정기 모임을 가진다. 다음 모임은 2월에 서강대에서 열릴 예정이다. 




발표 논문


MP3  뮤직플레이어를  위한  상황별  제스처  인터랙션 어휘 목록 디자인

- 채정이, 이상미, 정재열, 조광수(성균관대)


아동의 오인 문장 처리 능력과 실행 기능 간의 관계

- 손현주, 최영은(중앙대)


영어 억양 교육에의 다중감각 자극의 역할

- 김민정, 황중식, 조광수(성균관대)


자극 정서가와 기억 연합 강도에 따른 기억 억제 양상

- 홍유림, 이도준(연세대)


Mechanisms of  Jargon

- 김경화, 박주용(서울대)


Emotional  Ebbinghaus Illusion

- 최정원, 이장한(중앙대)


Kinect를  이용한  GI기반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 개발 및 평가

- 정원영, 유정선, 박호현, 조광수(성균관대)


물리 학습 상황에서 오락용 디지털 게임의 긍정적 역할

- 신호철, 조광수(성균관대)


P300-기반  유죄지식검사에서  sLORETA를  이용한 뇌 활동성 연구

- 정은경, 김영윤(경기대)


햅틱을  이용한  자동차  네비게이션  지원  시스템에서 자극제시간격의 차이에 따른 촉진 및 억제효과에 대한 연구

- 정경미, 현진실, 황중식, 조광수(성균관대)


외현적  및  암묵적  목표갈등이  음주자들의  음주행동 통제에 미치는 영향

- 신수경, 배진우, 임동훈, 민윤기(충남대)


정서가,  각성수준  및  지각적  복잡성과  정서변별 속도의 관계

- 김희은, 박태진(전남대)


공간 작업기억과제의 시각 현저성 및 의미적 일치성이 시각탐색간섭에 미치는 영향

- 김현우, 이영창, 배진우, 임동훈, 민윤기(충남대)


전역/국지처리  과제에서  유도된  기분이  시각적 주의범위에 미치는 영향

- 박선희, 박태진(전남대)


작업기억의 개인차와 문장의 이해

- 이윤형(대구가톨릭대), 권유안(고려대)


파킨슨병과 파킨슨병 치매 환자의 주의력 결함

- 김애경, 장문선, 최소영, 곽호완(경북대)


표현적 글쓰기가 작업기억 용량 변화에 미치는 영

- 이인선, 이광오(영남대)


안구운동 추적을 통한 성인  ADHD 성향균의 내생-외생 단서 탐지와 반응 억제 결함

- 조보현, 이상일, 장문선, 곽호완(경북대)


지각부담효과에 미치는 정서의 영향:  ERP 연구

- 김정희, 박태진(전남대)


인스턴드 메시지 내 이모티콘 사용 정도에 따른 문장 정서가 판단 및 정서인식 능력

- 이상일, 이윤정, 김소연, 이선주, 이호지, 조아름, 곽호완(경북대)


한글 단어 재인에서 한 글자 단어 열등효과

- 이광오, 김정연(영남대), 배성봉(경남대)


두  가지  원인이  존재할  때의  인과  추론에서  불안이 미치는 영향

- 김영일, 김경일(아주대)


글의 통일성 관계와 문법적 역할이 대명사 참조해결에 미치는 영향

- 김지애, 박권생(계명대)


키넥트를  이용한  행동측정의  효용성:  사이먼  효과와 뮐러-라이어 착시를 중심으로

- 손영준, 곽호완(경북대)


Relationship  between  Lexical  Diversity  of Comments  and Writing Quality

- 이남석, 조광수(성균관대)


음절 빈도 효과와 한자어 이웃 효과의  ERP증거

- 권유안(고려대), 이윤형(대구가톨릭대), 남기춘(고려대)


글 : 인지심리 매니아


최근 클루코스카라는 폴란드 여성이 페이스북을 통해 인터뷰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필자는 그녀의 요청의 따라 한국 심리학의 현 상황, 심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생활상 등을 성실히 답변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 전, 폴란드에서 열린 '해외 심리학(PSYCHOLOGIA ZA GRANICĄ)' 세미나에서 한국 학생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만든 한국 심리학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4월 26일 폴란드 SWPS Sopot PSYCHOLOGIA ZA GRANICĄ 세미나


이 보고서를 읽어보면 유럽 여학생의 눈에 비친 한국의 심리학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필자도 글을 읽어보면서 한국 심리학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 


이 보고서는 폴란드의 심리학 포탈 사이트인 'Charaktery'에 요약되어 있다. 구글 번역을 통해 폴란드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글을 쉽게 읽을 수 있다. 






글 : 인지심리 매니아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얼마 전부터 개인적 목적으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날도 평상시처럼 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강의 제목은 ‘인지심리학'이었다. 난 전공자라는 내색을 하지 않고 강의실 맨 뒷자리에서 담담하게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강의를 하시던 교수님께서 갑자기 15개의 단어가 제시된 슬라이드를 보여주셨다. 제시된 단어들을 1분 동안 외워보라는 것이었다.


회의              컴퓨터         전화

일                 종이            의자

프레젠테이션 펜               신발

   사무실           스탬프        테이블

마감일           화이트보드  비서


나는 이 테스트의 목적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수강생의 대부분은 디자인을 전공한 여학생들이므로 인지심리학 실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을 것이다

예상대로, 교수님은 다음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강의를 몇 분 동안 진행하셨다(일종의 간섭이었다).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학생들은 교수님의 말에 집중하고 웃으면서 방금 전 외웠던 단어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난 다음,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외웠던 단어를 종이에 써 보라고 주문하셨다. 학생들이 답을 다 쓰자, 교수님은 정답 슬라이드를 제시한 다음 채점해 보라고 하셨다. 

확인을 해 보니, 0-10개를 맞춘 학생의 수가 전체의 ⅔ 정도였다. 당연한 결과다. 심리학자 밀러의 말대로 인간은 평균 7개의 정보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혹시 10개 이상 맞은 학생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래도 꽤 많은 학생이 손을 들었다.

“혹시 다 맞은 분 있어요"

하지만 다 맞은 사람은 없었다.

“그럼 14개?  없어요? 그럼 13개?”


그 때 나랑 한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교수님은 1등을 한 우리 둘에게 커피를 사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아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저는 (분명히) 스태프를 ‘스탬프'로 보고 적었거든요.”


교수님이 슬라이드를 뒤로 돌려서 확인해 본 결과, 맨 처음 슬라이드에는 분명 ‘스탬프'라고 적혀있었다. 정답 슬라이드에 오타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맞춘 정답은 총 14개였다. “펜"을 “연필"로 잘못 쓰는 바람에 한 개를 틀린 게 흠이었다. 아무튼 인간의 평균인 7개보다는 확실히 높다. 


그 순간 강의실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그런데 하나같이 경악에 찬 눈빛이었다. 차라리 손을 들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서번트 증후군'으로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 결과에 대해 해명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쉬는 시간에 교수님, 여학생과 커피를 마시면서 내 정체를 밝힌 다음, 내가 단어를 어떻게 외웠는지 설명해 드렸다. 


우선, 두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첫째, 나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다만 인지심리학을 공부할 때 배운 암기법을 사용했을 뿐이다. 둘째, 나는 단어를 리허설하지 않았다. 나는 교수님이 단어를 외우라고 할 때 나중에 있을 갑작스런 검사를 예상했다. 하지만, 간섭이 일어나는 동안 단어를 반복해서 읊거나 상상하지 않았다. . 



내가 단어를 암기할 때 사용한 방법은 바로 장소법(Method of loci)이다. 장소법은 고대 그리스 때 부터 내려온 오래된 암기술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에게 익숙한 장소를 떠올린 다음, 외워야 할 단어의 이미지가 장소 곳곳에 놓여있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 단어를 인출하려면, 머리 속에서 그 장소를 뒤지면 된다. 


난 신입사원이 간부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 다음 각 단어들을 회의실 안에 배치해봤다. 회의실에는 화이트보드가 걸려있고, 한 사원이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간부들은 종이와 펜을 가지고 있으며, 테이블에는 스탬프가 있고....... 이런 식으로 단어를 외운 다음, 단어를 떠올릴 때는 상상했던 이미지를 다시 불러냈다. 그리고 이미지 속에서 내가 배치한 물건(단어)들을 찾으면 된다. 장소법을 사용한다면 누구나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장소법은 인지심리학이 소개하고 있는 효과적인 기억술 중 하나다.  Maguire는 영국에서 매년 개최되는 기억력 대회( World Memory Championships ) 우승자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10명 중 9명이 장소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공간 학습 전략이 장소법의 중요한 요소라고 결론지었다.[각주:1]


“The Nature of Thought”이라는 책은 장소법이 효과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장소법은 확실히 공간적이다. 참가자들은 이 전략을 이용해서 단어들을 특정 공간,장소적 문맥 안에 집어넣는다. 단어를 인출하려면 장소들을 머리 속에서 둘러보면 된다. [...] 개별적인 문맥에서 일어나는 사건(단어)일지라도 이 방법을 이용하면 맥락 간 차이에서 오는 혼란을 줄일 수 있고, 사건들 또한 유사해진다. 우리가 고향, 이웃, 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심적 지도는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는 공간적 맥락의 대표적 예이며, 내부적으로 부호화할 수 있고, 따라서 효과적으로 인출하거나 회상할 수 있다. Smith, Glenberg, Bjork(1978)나 Bellezza, Reddy(1978)의 연구는 장소법의 위력이 이런 ‘일상의' 이점을 빌리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


나는 13개를 맞춘 여학생과도 대화를 나누어봤다.  

“저는 단어를 이미지로 연상해서 외웠어요.”

“실은 저도 그렇게 외웠거든요.”


그 여학생 역시 장소법과 비슷한 전략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똑똑한 여학생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살짝 웃었다. 



  1. Routes to remembering: The brains behind superior memory. Maguire, Eleanor A.; Valentine, Elizabeth R.; Wilding, John M.; Kapur, Narinder Nature Neuroscience, Vol 6(1), Jan 2003, 90-95. [본문으로]




드라마 '유령'




글 : 인지심리 매니아



최근 드라마에서는 옛 연인을 닮은 사람과 만나는 스토리가 유행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닥터 진'과 ‘유령'이다.


‘닥터 진’에서, 진혁(송승헌)은 우연히 조선 시대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여자친구와 똑같인 생긴 여자(영래 아씨)를 발견한다. 진혁은 영래 아씨와 거리를 두려 하지만, 12회에서 아씨에게 마음이 있음을 솔직히 표현한다. 


닥터 진



반면 ‘유령’은 닥터 진의 경우와 조금 다르다. 유강미(이연희)는 자신이 좋아하던 김우현(소지섭)과 똑같이 성형수술을 한 박기영(최다니엘)을 도와준다. 유강미는 그가 박기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김우현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8회 방송에서 박기영이 다른 여자와 키스하려 했다고 말하자, 유강미는 내심 질투한다. 

(아래 동영상 2:20와 4:25)




두 드라마의 공통점은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과 닮은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드라마를 보다가 이런 일이 현실에서 가능한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순간, 폴 블룸의 연구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현실 속 사람들은 자신의 옛 연인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폴 블룸(Paul Bloom)은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이며 발달심리학, 언어심리학 분야의 권위자이다. 그는 자신의 책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에서 인간이 본질주의자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물건에 관심을 가지거나 이를 통해 쾌락을 느끼는 이유는 그 대상의 ‘본질'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과 겉모습만 같은 다른 대상은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

저자
폴 블룸 지음
출판사
살림 | 2011-06-07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똑같은 와인도 상표에 따라 맛이 달라지고 같은 그림도 유명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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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간의 사랑에도 본질주의가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잠깐 사랑에 관한 설명을 읽으면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내게 특별한 그 사람과 똑같이 생겨서 아무도 구별하지 못할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자. 게다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유전자가 동일하고 부모도 같고 같은 집에서 자랐다. 한마디로 일란성 쌍둥이를 떠올려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특징에 끌렸다면 쌍둥이 형제에게도 똑같은 매력을 느껴야 한다.[각주:1] 흥미롭게도 쌍둥이와 결혼한 사람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서는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결혼한 배우자에게만 매력을 느끼지, 똑같이 생긴 쌍둥이 형제에게는 끌리지 않는다.”[각주:2]


인간의 본질주의는 아마도 타고나는 것 같다. 폴 블룸과 동료들이 2008년에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각주:3]을 살펴보자. 그들은 아이들이 아끼는 물건(엄마의 대리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간 대상transitional object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곰인형이 있다)을 복제 장치라는 기계에 넣는다. 그리고 이 장치를 이용하면 원래 물건과 똑같이 생긴 물건을 복제할 수 있다고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기계에서 복제된 물건이 나온 다음, 연구자는 아이들에게 원래 물건과 복제된 물건 중 어떤 것을 가져갈지 선택하게 했다. 


그 결과, 원래 물건이 중간 대상이 아닌 경우 복제된 새 장난감을 가져간다는 응답이 많았다. 하지만 원래 물건이 중간 대상인 경우, 원래 물건을 가져가겠다는 응답이 많았다. 


이 실험은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다. 아이들이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버리지 않은 이유는 그 물건이 가진 고유한 본질, 추억과 역사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본질이 복제된(즉 겉모습이 같은 ) 물건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복제된 물건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인간은 그 사람의 본질, 그 사람과 함께 겪었던 역사, 추억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본질은 고유하기 때문에 겉모습이 닮았다고 해서 본질도 같을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옛 연인과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지라도 그가 옛 사람과 본질까지 동일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옛 연인과 닮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드라마에선 가능하겠지만 현실에서는 드물 것 같다.




  1. Wright,L. 1997. Twins: and what they tell us about who we are. New York: Wiley. [본문으로]
  2.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 133pp [본문으로]
  3. Bruce M. Hood, Paul Bloom, Children prefer certain individuals over perfect duplicates, Cognition, Volume 106, Issue 1, January 2008, Pages 455-462, ISSN 0010-0277, 10.1016/j.cognition.2007.01.012. [본문으로]




진화 과정. - 출처 : http://chelseavose.wordpress.com


글 : 인지심리 매니아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필자는 인공지능, 특히 유전 알고리즘을 코딩해서 실행해 볼 때마다 놀랍다는 생각을 한다. 얼마 전, 변수가 여러 개인 방정식의 해를 구할 일이 생겼다.  PHP로 인공지능을 만들어서 실행시켰더니, 순식간에 답을 도출해냈다. 인간이라면 하루종일 계산해야 할 일을 컴퓨터가 뚝딱 해결한 것이다.


유전 알고리즘(Genetic Algorithm)이란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한 통계적 탐색 알고리즘 집합이다. 예를 들어 15x-x^2이라는 함수의 최대값을 찾는 문제를 푼다고 생각해보자. 유전 알고리즘은 이 함수(적합도 함수)를 풀기 위해 가능한 모든 답(해집단)들을 임의로 생성한다. 그 다음 해집단 사이에서 교배가 일어난다(정수를 이진수로 바꾼 다음, 둘둘씩 짝지어서 이진 수를 교환한다. 마치 실제 교배에서 자식이 양 부모의 유전자를 타고 나는 것과 유사한 원리다). 이 때 적합도가 가장 높은 염색체는 교배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고, 결국 많은 자손을 낳게 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적합도가 가장 높은 염색체의 자손들만이 살아남게 되고 결과적으로 적합도 함수의 정답에 가까워진다.



교배(교차) 과정. 양 부모의 유전자 중 화살표 오른쪽 부분이 교차되어 자식에게 유전되었다. 출처 : http://www.learnartificialneuralnetworks.com/geneticalg.html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유전 알고리즘이 인간의 창의성과 무척 유사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창의성이 ‘발산적 사고'와 ‘수렴적 사고'로 구성되어 있다고 정의한다. 즉, 수 많은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한편 문제 해결에 유용한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고를 수 있는 능력이 함께 요구되는 것이다. 유전 알고리즘에서 해집단을 임의로 생성하거나 교배하는 과정은 발산적 사고와 유사하다. 하지만 해집단은 적합도 함수에 적합해야 하는 점에서 수렴적 사고의 측면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창의성을 진화적 관점에서 설명한 도널드 캠벨(Donald Campbell)은 이 사실을 5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수십 년 전, 앨런 튜링은 인간의 사고를 컴퓨터로 비유하면서 인지 과학 혁명을 일으켰다. 필자는 앨런 튜링처럼 위대한 학자가 아니지만, 유전 알고리즘의 비유가 인간의 창의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사실 창의성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한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창의성에 대한 적절한 모델을 인공지능에서 차용한다면, 창의성을 둘러싼 수 많은 논쟁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필자는 유전 알고리즘의 성능 그래프(performance graph)를 관찰하던 중, 적합도 곡선이 이따금 인간의 ‘통찰'과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00세대에 걸친 염색체 6개의 성능 그래프



위 그래프는 최대 적합도를 가진 염색체와 해집단 전체의 평균 적합도를 나타낸다. 두 그림에서 최대 적합도의 곡선은 점진적이라기 보다는 특정 시점에서 급격히 상승하는 ‘계단식’ 곡선에 가깝다. 이 패턴은 통찰을 필요로 하는 문제에서 사람들이 처음에는 정답을 생각하지 못하다가(impasse), 갑자기 통찰을 얻는 패턴(‘a-ha’ 또는 ‘유레카’)과 매우 유사하다. 만약 유전 알고리즘이 창의성을 표상하는 적절한 모델이라면, 창의성에서 논란이 되었던 두 문제에 해답을 줄지도 모른다. 


우선, 유전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다가 통찰이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위 그래프에서 한동안 적합도에 개선이 없는 이유는 ‘그 밥에 그 나물을' 조합하기 때문이다. 각 염색체의 적합도가 서로 비슷할 경우 교배를 해도 적합도에 큰 개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정체 현상이 찾아온다. 즉, impasse가 발생한 것이다. 문제를 극적으로 해결하는 요인은 바로 ‘변이(Mutation)’다. 별반 다를 바 없는 염색체들 사이에서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돌연변이는 적합도를 순식간에 향상시킨다. 변이율이 큰 두번째 그림에서 적합도가 더 커지는 사실을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이 원리를 창의성에 적용해 보자. 어떤 문제에 대해 우리가 6개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이 6개의 아이디어가 문제 해결의 적합성 측면에서 비슷비슷하다면, 아이디어들을 서로 조합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물론, 처음부터 해결책이 머리 속에 있다면 문제는 단번에 해결되거나 몇 번의 교배만으로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다소 기발한 생각이나 외부로부터 얻은 새 아이디어는 문제를 극적으로 해결한다. 


결론적으로, 유전 알고리즘은 impasse가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 통찰을 제공한다. 문제가 한동안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적합하지 않은 생각들 속에서, 또는 자신의 한정된 지식 사이에서 아이디어를 내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의 재조합(교배)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극적인 생각의 변화(즉 변이)가 동반되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극적인 생각의 변화가 뇌에서의 이상 현상 때문인지, 또는 외부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정보 때문인지는 의문이다(자르페이트의 연구 결과는 이 주장을 뒷받침 하고 있다).


또, 유전 알고리즘의 성능 그래프 결과는 통찰이 점진적으로 획득된다는 견해(Durso et al, 1994, Novick and Sherman, 2003a)와 불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인의 상식처럼,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통찰을 얻으면서 해결되는 듯 하다.  최근, 통찰이 갑자기 찾아온다는 사실을 입증한 인지신경과학 연구(2011/08/03 - [인지심리기사/창의] - 통찰(insight)의 신경학적 근거)들은 이 추측에 무게를 실어준다.










조나단 하이트는 인간이 '도덕적 감정'을 지니고 태어나며, 이 감정이 진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 심리학자다. 


이 강연에서, 그는 인간이 종교 등을 통해 자아를 초월(Self-transcendence)하려는 이유를 설명한다.  지구 상의 모든 종은 진화 과정에서 '집단 선택'을 위해 구성원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인간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며, 구성원의 협력을 도모하기 위해선 도덕, 종교, 정치 등의 수단이 필요했다. 결국 인간은 도덕, 종교, 정치 등을 통해 자신을 초월하고 타인을 위할 때 강렬한 행복을 느끼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









글 : 인지심리 매니아



얼마 전부터 지인의 부탁으로 고 2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게 되었다. 이 학생은 수학은 잘 하지만 영어를 못해서 고민이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하기 위해 학생의 독해 방식을 유심히 관찰하던 중, 모르는 영어 단어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넌 단어를 어떻게 외우니?” 그 학생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그냥 단어를 입으로 수없이 반복하면서 외운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학생에게 단순 반복은 암기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단순 반복은 그야말로 ‘최악'의 단어 암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특정 단어나 숫자를 입으로 반복(인지심리학에서는 시연, rehearsal이라고 한다)하면, 해당 정보는 작업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유지된다. 지금부터 ‘48932375’라는 숫자를 입으로 반복해보면 이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입으로 계속 ‘사팔구삼이삼칠오'라고 중얼거리는 동안은 숫자를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도 이런 이유 때문에 단순 반복이 정보를 기억하는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당신이 일주일 뒤에도 이 숫자를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아니, 지금 이 문장을 읽는 동안 이미 숫자를 까먹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맞다. 단순 반복 만으로는 정보가 장기 기억에 저장된다고 보장할 수 없다. 정보가 장기 기억에 통합되기 위해선 다른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48932375를 새하얗게 잊어버린 것처럼, 단순 반복 전략을 쓴 학생들도 자신이 외운 영단어를 금세 잊어버리게 된다. 



그 날 이후로 어떻게 하면 이 학생이 단어를 쉽게 외울 수 있을지 궁리한 끝에, 필자는 조금 독특하지만 효과적인 단어 암기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암기법을 ‘단어 퍼즐'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암기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외우고자 하는 영 단어를 죽 나열한다. 그 다음, 나열한 단어를 모두 사용하여 짧은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예)

1. 외우고자 하는 단어를 나열한다

Determine comfort consume object impress available contain diet recognize material


2. 각 단어를 모두 사용하여 짧은 이야기를 만든다.

Recently, FDA Determined some diet foods are not safe. These diet foods which are available to buy on the internet contain harmful material. The medicines company recognized that their products contains morphine, so make consumers comfortable temporarily. Doctors also objected to using these diet foods.



처음에는 이 암기법이 효과가 있을지 반신 반의했다. 그런데, 이렇게 작문 숙제를 내주자 학생의 단어 재인률이 높아졌다. 더 신기한 건 학생 뿐 아니라 선생인 필자 역시 수 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작문 내용과 단어를 잘 기억한다는 점이다. 학생 뿐만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던 선생님도 단어를 모두 외운 것이다. 


이 암기법은 사실 인지심리학 이론를 토대로 만든 것이다. 우선, 필자는 정보가 장기기억에 통합되거나 인출될 때 유리하게 작용하는 과정들을 모두 열거해 봤다. 그리고 그 중 정교화, 부호화 특수성, 도식, Salience라는 요인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암기법을 만들었다.


첫째, 이 암기법은 정교화(Elaboration)를 활용한다. 정교화란 주어진 정보 이외에 부가적으로 연결되는 명제를 생성하는 과정을 말한다. 주어진 단어로 문장을 만들면, 단어가 스토리의 문장(명제)과 연합된다. 단어에 수많은 명제가 연결되면, 나중에 기억을 인출할 단서가 풍부해진다. 즉, 이야기의 문장 또는 함께 쓰인 단어(인출 단서) 중 하나만 기억하더라도, 이와 연결된 해당 단어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둘째, 이 암기법은 부호화 특수성 원리에 충실하다. 부호화 특수성은 기억 과정과 인출 과정이 유사할 때 기억이 잘 떠오른다는 원리다. 단순 반복의 경우 단어의 소리를 반복하기 때문에, 단어의 발음을 기억해보라고 하면 기억이 잘 날지는 모르나 단어의 ‘뜻'은 기억이 안 나기 쉽다. 반면, 이 암기법은 작문 과정에서 단어의 의미를 끊임없이 떠올려야 하기 때문에 나중에 다른 지문에서 단어가 출현할 경우 뜻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셋째, 이 암기법은 도식을 활용한다. 도식은 사건 등을 표상하는 지식의 덩어리다. 우리는 흔히 ‘흥부와 놀부’하면 주걱과 박을 떠올린다. 주걱과 박은 ‘흥부와 놀부'라는 스토리(도식)의 일부분을 이루기 때문에, 이야기 제목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다. 앞서 살펴봤지만, 이 암기법을 통해 외운 단어들은 학생이 만들어 낸 ‘스토리'에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일단  자신의 이야기를 회상할 경우, 단어들이 실타래 따라오듯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암기법은 Salience를 활용한다. 주어진 단어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만들려면, 스토리가 다소 엉뚱하거나 창의적인 방식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기억은 도식에 맞지 않거나 이상한 정보에 민감하다. 따라서 기발하거나 창의적인 스토리는 단어의 기억이 지속되도록 도와준다.


그 외에도 이 암기법은 깊이 처리 이론, 최근 대두 되고 있는 '스토리텔링'의 힘을 빌린다는 점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지만 단점도 있다. 일단 학생에게 영어 작문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에게 단어를 주고 작문을 해 보라고 하면 대부분 어려워할 것이다. 특히, 영어 실력이 부족한 중학생의 경우 실효성이 적을 수 있다.


또, 이 암기법으로 단어를 암기한 후에도 해당 단어를 다양한 지문에서 다시 접해봐야 한다. 단어는 맥락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지문에서 나올 경우 전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고, 따라서 뜻이 쉽게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암기 후에도 다양한 지문을 읽으면서 단어를 여러 번 접해야 한다.





이정모 교수님이 2012년 2월 21일에 블로그에 올리신 글입니다.
카네만 교수의 연구를 바탕으로 인간의 오류와 교만을 지적하셨네요.
저도 이 글을 읽고 반성을 하게 됩니다.

이정모 교수님 글 바로가기 



글: 인지심리 매니아

어느 날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한 여학생을 발견했다. 무심코 지나쳐서 신호등을 건넌 다음 10분쯤 더 달리다가,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해서 방향을 돌렸다. 좀전에 지나쳤던 신호등에 다시 도착했을 때 여학생은 사라지고 없었다.

텅빈 정류장을 지나치면서 갑자기 묘한 느낌을 받았다. 짧은 시간이 경과했을 뿐인데 방금 전 정류장에 서 있던 사람이 사라지고 없다. 너무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느낌을 받은 이유는 현상의 변화무쌍함 때문이었다. 시간이라는 태엽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변화하거나 소멸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위를 둘러싼 환경은 그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이 없다. 우리는 영화 '큐브'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처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계속 변화하며 늙는다고 설명했다.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은 아닛짜(무상)라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둑카(고, 苦)에 싫어함을 갖나니

오직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 법구경 277 -


사람들은 현상이 무상함을 알지 못하고 영원하다고 착각함으로써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사실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말 '무상'이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할까? 정말 만물이 영원하다고 생각할까?

만약 사람들이 현상을 영구적이라고 믿는다면, 현상이 출현해서 소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할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가설을 검증코자 성균관대 인지심리학 동아리 '심리학의 꽃' 학생들과 페이스북 인맥들에게 짧은 설문지를 배포하는 엉터리 실험을 진행했다.

설문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 철근 콘크리트 건물 수명

2. 음식점의 평균 수명

3. 푸들의 평균 수명

4. 중소제조업의 평균 수명

5. 대기업의 평균 수명

6. 직장인의 평균 이직 주기

7. 결혼 후 이혼까지의 평균 동거 년수


만약 사람들이 현상을 영구적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면, 현상의 지속기간을 과대평가할 것이다. 따라서 참가자의 응답은 정답에서 +방향으로 벗어난 분포를 보일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작성한 설문지를 회수한 다음, 분석을 위해 각 문항의 편차 점수(응답-정답)를 구하고 One-sample t 검증(검증값=0)을 해 봤다. 문항별 분석 결과는 아래와 같다.



  N
편차 평균
표준 편차
t
 유의확률
 콘크리트 건물
 12  -8.0833  18.54948  -1.51  .159
 음식점  11  2.1364  2.0505  3.456  .006
 푸들  13  -2.2308  3.56263  -2.258  .043
 중소기업  12  -2.8833  5.24765  -1.903  .083
 대기업  12  2.15  14.47961  .514  .617
 이직주기  12  2.25  1.71226  4.552  .001
 결혼~이혼  12  -1.8333  11.59807  -.548  .595



평균 0에서 벗어나 있는 문항은 3개 문항이었으며, 그 중 두 문항의 편차 점수가 양수였다. 결국 음식점과 이직주기를 제외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정답을 잘 맞췄거나 오히려 과소평가했다.

그 다음 문항간 분석을 위해 각 문항의 편차 평균을 대상으로 T-test를 실시했다. 그 결과 평균은 -1.21, t=-.848, p=.429였다. 즉, 전체 문항들을 분석했을 때도 편차는 0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즉, 사람들의 응답이 대체적으로 정답에 근접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상의 지속기간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실험에 몇 가지 문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먼저, 가설이 논리적으로 타당한지 의문이다. 두번째로, '현상'이라는 개념이 워낙 광범위해서 실험에 사용한 문항만으로 포착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는 실험법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의 반응을 단순히 기술했다는 한계가 있다.

실험 결과를 놓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쩌면 부처의 말처럼 우리는 무상이라는 개념에 무지할지 모르고, 이렇게 간단한 설문지만으로는 그런 무지를 포착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누군가 좀 더 정교한 실험을 한다면,  '무상'이라는 깨달음을 방해하는 인지적 편향이 우리 안에 있음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자꾸 하면 어리석어진다


피노키오의 코



글: 인지심리 매니아

불교의 십선계 중 불망어(不妄語)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코이케 류노스케는 '생각 버리기 연습'에서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불망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꾸 원래와 다르게 사실을 말하다 보면, 마음은 바르지 않은 정보를 바른 정보 위에 덧쓰게 된다. 사실과 거짓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정보가 마음에 새겨지면 정보처리능력이 떨어지고, 장기적으로는 기억들 사이의 연결이 혼란스러워진다.

이 말은 정말일까?
아니면 거짓말 하는 사람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하는 일종의 거짓말일까?

인간이 사실과 거짓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따라서 거짓말은 본인이나 타인에게 큰 손해가 된다. 심리학 연구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어떤 피해를 입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거짓말로 인해 타인이 입는 손해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코이케 류노스케는 거짓말이 기억들 사이의 연결에 혼란을 가져온다고 말했는데, 이건 정말 사실이다. 인지심리학 연구에서는 로프터스 교수의 실험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어느 날, 로프터스 교수는 학생들로 하여금 동생에게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게끔 한 적이 있다. 그 중 한 사례를 살펴보자. 한 학생은 자신의 동생에게 어릴 적 쇼핑몰에서 길을 잃어버렸던 사건을 기억하냐고 물어봤다. 동생은 사실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동생은 겪지도 않은 일들을 기억해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사건 당일 느꼈던 감정이나 대화까지도 기억해냈다. 있지도 않은 일을 기억해낸 것이다.


이런 경우는 주변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피의자 심문 단계에서 조사자가 일어나지 않았던 사실을 집중추구할 경우, 피의자가 거짓자백을 하는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피의자는 자신이 혐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집중추구를 당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원래 기억과 조사관의 말을 헷갈리게 된다. 결국 피의자는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잘못 기억하게 된다.

심리학 연구결과는 중요한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거짓말은 듣는 사람의 장기 기억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짓말로 인해 자신이 입는 손해

그럼 본인의 경우는 어떨까? 본인은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분명 알고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거짓말을 하는 당사자는 코이케 류노스케의 말처럼 자신의 기억 사이에서 혼란을 겪지 않을 것이다. 정말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코이케 류노스케의 말이 정답이다. 거짓말 하는 사람도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기억이 왜곡될 수 있다.

2004년 Psychological Science에 실린 심리학 연구를 살펴보자[각주:1]. 이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생생한 상상을 실제 봤던 것처럼 착각하는 현상을 관찰했다. 그들은 이 현상을 유도하기 위해 참가자에게 다음과 같은 실험 절차를 사용했다.




학습 단계에서 참가자중 절반은 Word+Picture, 나머지 절반은 Word Only 조건에 할당되었다. 단어는 글자 또는 음성으로 제시되었다. 단어와 그림이 함께 나오는 경우 단어가 제시된 후 단어와 일치하는 그림이 제시된다. 반면, 단어만 나오는 조건은 그림이 제시되지 않는다.
참가자들은 이런 단어쌍 수백개를 본 다음 테스트를 거친다. 이 테스트는 특정 단어를 보여준 뒤, 이 단어에 해당하는 그림을 학습 단계에서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본다.

인간은 단어를 듣고 단어에 해당하는 시각적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 상상한 것과 실제경험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고 가정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참가자들은 단어만 제시되었던 경우에도 그림까지 봤다고 잘못 기억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실험 결과, 예상대로 사람들은 상상과 진실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단어만 보여준 경우, 사람들이 그림까지 봤다고 답한 경우가 전체 문항의 27%나 되었던 것이다. 반면 학습 단계에서 단어, 그림을 모두 보여준 적이 없는 새 단어의 경우 오류율은 6%에 그쳤다. 따라서 상상을 진실로 착각한 경우가 상상하지 않은 경우보다 오류율이 4배나 높은 것이다.
연구자들은 상상과 진실을 착각하는 현상이 뇌의 어떤 부위와 관련있는지 알아봤다. fMRI 결과, 전대상회, precuneus regions, right inferior parietal area가 이 현상과 관련있었다. 반면, 정확한 기억의 경우 left inferior prefrontal 영역의 활성화가 두드러졌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시각적으로 상상한 것과 실제 있었던 일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비록 시각적 상상에 국한된 연구이긴 하지만, 이를 통해 거짓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거짓말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거짓 사실을 머리 속에서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상상이 뚜렷하면 뚜렷할 수록, 거짓말 하는 당사자의 원래 기억은 왜곡된다. 결국, 자신이 한 거짓말에 자신이 속아넘어가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진리에는 변함이 없다. 불망어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기억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 같다.

필자는 '생각 버리기 연습'의 저자가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일 때마다 매번 감탄한다.
  1. Gonsalves, B., Reber, P. J., Gitelman, D. R., Parrish, T. B., Mesulam, M.-M., & Paller, K. A. (2004). Neural evidence that vivid imagining can lead to false remembering. Psychological Science, 15, 655–660. [본문으로]


글: 인지심리 매니아

가 끔은 세상에 태어나서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한다. 지하철을 나와서 학교 가는 버스를 타면 꼭 하늘을 한번 쳐다본다. 파란 하늘처럼 아름다운 색깔이 없기 때문이다. 비단 이것 뿐만 아니다. 교정들 거닐면 학생들의 웃는 소리,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를 유심히 들어본다. 자세히 들어보면 하나같이 아름답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꽃이 다른 물체와 구분되어 정확하게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참 경이로운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상에 대한 지식은 현상 자체와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색깔이 다. 사실 이 세상에는 색이라는 게 없다. 오직 빛의 파장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특정 파장을 특정 색으로 지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하늘을 쳐다볼 때 아름다운 푸른색을 경험할 수 있다. '파란색'은 우리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표상일 뿐이다.

인간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경험했던 모든 감각들은 우리 머리 속에 저장된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자체를 우리 머리 속에 집어넣을 수 없다. 결국, 학교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일종의 '표상'으로 만들어서 머리에 저장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 머리 속에 그 사람의 얼굴을 직접 집어넣지도 않았는데 기억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의 얼굴을 표상하는 무언가가 머리속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컴퓨터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컴퓨터를 사용할 때, 컴퓨터는 오직 0과 1이라는 정보를 이용해서 정보를 처리한다. 하지만 컴퓨터 화면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출현한다. 네이버 까페 화면이 나타나고, 사진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이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0과 1이라는 정보(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기적 신호일 것이다)를 우리가 지각할 수 있도록 표상으로 변환한 것이다.



우리 머리 속 내적 표상은 세상을 재표현(representation)한다.

표상은 이처럼 대상(물론 대상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럼 여기서 내가 표상을 강조하는 이유는 뭘까?

인간은 외부 환경에서 받은 정보를 토대로 '심적 표상(mental representation)' 을 만들어낸다. 이 심적 표상은 인간이 처리하는 정보의 기본 단위가 된다. 표상은 물체 재인에서 기억, 언어, 고차적인 인지 기능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인지심리학은 인간 마음의 메뉴얼, 특히 인간이 표상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설명해 놓은 메뉴얼이다. 앞으로 글을 써 나가면서 설명하는 모든 주제들이 바로 머리 속 '표상'을 기본단위로 삼을 것이다. 그래서 표상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자신의 일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진짜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뇌가 현실을 토대로 만들어 내는 표상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껴보자. 색깔, 촉감, 말소리, 상상.......  세상에 태어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 사실은 인지심리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더 소중해진다.

앙리 루소 - 꿈

Posted by 인지심리 매니아


스토리가 이어지는 꿈


살 면서 꿈을 꿔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꿈은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지만 우리 대부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가 꾼 꿈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잠깐 생각해 볼 때도 있지만, 이내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잊어버린다. 우리는 꿈을 하찮게 여기며 살아간다.

그 렇다면 지금부터 재미있는 사고 실험을 해보자. 만약 당신이 어느 날 새벽 가수가 되는 꿈을 꿨다고 가정해보자. 아침에 일어난 당신은 그저 꿈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스토리가 이어지는 꿈을 또 꾸었다고 생각해보자. 꿈 속에서 당신은 자신이 어제 꿈에서 가수가 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꿈 속에선 공중파 방송사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다음날 꿈 역시 스토리가 이어진다. 당신은 어제 꿈에서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사실을 기억한다. 당신은 꿈에서 자신의 트위터에 수많은 댓글이 달린 것을 확인한다. 이럴 수가.... 어제 프로그램에서 당신이 출연한 사실 때문에 소셜 네트워트가 폭주한 것이다.

만 약 이렇게 꿈이 며칠, 아니 몇 년 동안 일관성 있는 스토리로 계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부터 우리는 꿈이 자신의 실제 삶이라고 착각할지 모른다. 우리는 꿈이 실제 삶인지, 실제 삶이 꿈인지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매일같이 가수로서 살아가는 삶을 살다가 잠이 들고, 또 다른 삶에서 깨어나서 평범한 학생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잠이 들면 다시 가수의 삶으로 돌아온다. 마치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꿈에서 또 하나의 '나'라는 자아가 탄생한 것이다.


노경 - 호랑나비


하 지만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꿈에서의 내 삶이 진짜 내 삶이라고 착각하려면, 즉 또 하나의 자아가 탄생하려면 추가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바로 '기억'이다. 가수의 꿈에서 자신이 어제 꿈에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오늘 꿈에서 댓글이 달린 것이 프로그램 출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수'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꿈을 자신의 진짜 자아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스토리가 일관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오늘 꿈에서 지난 꿈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문에 꿈 안에서 일관된 자아를 형성할 수 없는 것이다.


꿈 에 대한 사고실험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바로 기억이 자아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사실이다. 이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내가 오늘 아침에 깨어났는데 어제 일을, 또는 지난 모든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 즉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기억은 자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기억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생활할 수 있다.

그럼, 어떤 기억이 자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할까? 인지심리학은 기억을 여러 종류로 구분하는데, 그 중 자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이 자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전적 기억은 개인적 경험에 관한 일화적 기억을 말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많은 학생들 앞에서 발표를 했던 일,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바닷가로 놀러갔던 일... 이렇듯 시간과 장소라는 맥락에 의존하는 기억이 자전적 기억이다.




기억의 오류


그 런데, 자전적 기억은 실제 일어났던 일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을까? 그건 의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겪었던 일의 대부분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기억에는 오류도 많다. 인간은 때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도 일어났다고 기억하거나,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기억하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성폭행에 관한 기억이다. 미국에서는 한 때 자신이 어렸을 적 부모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소송을 제기해서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전문가로부터 상담을 받던 중 우연찮게 자신이 성폭행 당한 기억을 되살려냈다.


하 지만 이들의 기억이 정확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로프터스(Loftus)는 이들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 용감한 교수다. 로프터스는 1994년 연구에서 한 소년에게 '거짓 기억'을 심는데 성공했다. 5살 때 길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학생에게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고 말해주자, 소년이 사건의 디테일을 하나하나 기억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겪지도 않은 일의 디테일을 어떻게 회상할 수 있단 말인가! 로프터스는 일련의 실험을 진행한 끝에, 인간의 기억은 주위 사람에 의해 '주입'될 수 있으며, 성폭행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기억 역시 상담자의 말에 의해 주입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로프터스는 이 주장을 한 이후 학교를 옮겨야 했으며, 소송에도 시달려야 했다).
* 이와 관련된 논란은 아직도 진행중이며, 더 많은 연구결과가 필요할 것 같다.


영화 메멘토 - 당신의 기억은 믿을 수 있는가?


기억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한다는 사실은 인지심리 연구를 통해 밝혀진 재공고화(reconsolidation) 현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를 참조하기 바람). 인간의 기억은 장기기억 체계에 저장되어 있다가 인출된다. 그런데, 특정 기억이 인출되는 순간 단단하던 기억이 '물렁물렁'해진다. 따라서 인출되는 순간 기억은 다른 형태로 변화가 용이하고, 기억의 변형이 일어나기도 한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다. 자신이 과거의 일을 회상할 때마다 내용이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것 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겪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된 현상으로 아동기 기억상실현상(childhood amnesia)과 회고절정(reminiscence bump) 현상을 들 수 있다. 다들 아는 사실이겠지만, 인간은 대체로 5세 이전에 겪었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자신이 엄마 뱃속에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 기억을 한번 의심해 볼 것). 그런가 하면 특정 시기에 겪었던 일을 유난히 잘 기억하는 회고절정 시기도 있다. 회고 절정은 보통 청소년기~초기 성인기에 나타난다. 따라서 나이 들어서 겪었던 일보다는 대학교 1학년때 겪었던 일들이 많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편집된 영화다


기억 연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 기억이 고정불변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기억은 대체로 정확하지만, 다소 왜곡되고, 생략되고, 편집된 기억이다.


이 런 점에서 우리는 '영화 감독'과 유사하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촬영하는 영화감독이다. 우리가 한컷 한컷 찍는 scene(기억)이 우리 영화의 내용(인생 또는 자아)을 결정한다. 우리는 영화 감독인 만큼 우리 영화의 내용을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필름에 담긴 모든 내용들을 그대로 영화로 만들 필요는 없다. 때로는 불필요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scene을 삭제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추가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자 신이 살아왔던 지난날을 한번 돌아보고, 어떤 기억들이 남아있는지 살펴보자. 온통 불쾌하고 나쁜 기억으로 가득차서 자기 자신이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낙담할 필요 없다. 우리 기억은 진실을 완벽하게 반영하지도 않으며,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비참했던 일을 평생 기억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이미 촬영된 필름을 아름답게 편집할 수 있다. 즐거웠지만 잊혀진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고, 우울한 장면을 뽀샵처리해서 밝게 만들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하는 행동에 따라서 영화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영화를 위해서 잘려나간 기억을 찾아보길 바란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주인공 토토는 인생의 중년을 훌쩍 넘긴 뒤에야 수없이 편집된 키스 장면 모음을 모두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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