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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심리기사/인지심리 칼럼

효과적인 단어 암기법 2



글 : 인지심리 매니아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얼마 전부터 개인적 목적으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날도 평상시처럼 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강의 제목은 ‘인지심리학'이었다. 난 전공자라는 내색을 하지 않고 강의실 맨 뒷자리에서 담담하게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강의를 하시던 교수님께서 갑자기 15개의 단어가 제시된 슬라이드를 보여주셨다. 제시된 단어들을 1분 동안 외워보라는 것이었다.


회의              컴퓨터         전화

일                 종이            의자

프레젠테이션 펜               신발

   사무실           스탬프        테이블

마감일           화이트보드  비서


나는 이 테스트의 목적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수강생의 대부분은 디자인을 전공한 여학생들이므로 인지심리학 실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을 것이다

예상대로, 교수님은 다음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강의를 몇 분 동안 진행하셨다(일종의 간섭이었다).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학생들은 교수님의 말에 집중하고 웃으면서 방금 전 외웠던 단어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난 다음,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외웠던 단어를 종이에 써 보라고 주문하셨다. 학생들이 답을 다 쓰자, 교수님은 정답 슬라이드를 제시한 다음 채점해 보라고 하셨다. 

확인을 해 보니, 0-10개를 맞춘 학생의 수가 전체의 ⅔ 정도였다. 당연한 결과다. 심리학자 밀러의 말대로 인간은 평균 7개의 정보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혹시 10개 이상 맞은 학생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래도 꽤 많은 학생이 손을 들었다.

“혹시 다 맞은 분 있어요"

하지만 다 맞은 사람은 없었다.

“그럼 14개?  없어요? 그럼 13개?”


그 때 나랑 한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교수님은 1등을 한 우리 둘에게 커피를 사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아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저는 (분명히) 스태프를 ‘스탬프'로 보고 적었거든요.”


교수님이 슬라이드를 뒤로 돌려서 확인해 본 결과, 맨 처음 슬라이드에는 분명 ‘스탬프'라고 적혀있었다. 정답 슬라이드에 오타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맞춘 정답은 총 14개였다. “펜"을 “연필"로 잘못 쓰는 바람에 한 개를 틀린 게 흠이었다. 아무튼 인간의 평균인 7개보다는 확실히 높다. 


그 순간 강의실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그런데 하나같이 경악에 찬 눈빛이었다. 차라리 손을 들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서번트 증후군'으로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 결과에 대해 해명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쉬는 시간에 교수님, 여학생과 커피를 마시면서 내 정체를 밝힌 다음, 내가 단어를 어떻게 외웠는지 설명해 드렸다. 


우선, 두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첫째, 나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다만 인지심리학을 공부할 때 배운 암기법을 사용했을 뿐이다. 둘째, 나는 단어를 리허설하지 않았다. 나는 교수님이 단어를 외우라고 할 때 나중에 있을 갑작스런 검사를 예상했다. 하지만, 간섭이 일어나는 동안 단어를 반복해서 읊거나 상상하지 않았다. . 



내가 단어를 암기할 때 사용한 방법은 바로 장소법(Method of loci)이다. 장소법은 고대 그리스 때 부터 내려온 오래된 암기술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에게 익숙한 장소를 떠올린 다음, 외워야 할 단어의 이미지가 장소 곳곳에 놓여있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 단어를 인출하려면, 머리 속에서 그 장소를 뒤지면 된다. 


난 신입사원이 간부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 다음 각 단어들을 회의실 안에 배치해봤다. 회의실에는 화이트보드가 걸려있고, 한 사원이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간부들은 종이와 펜을 가지고 있으며, 테이블에는 스탬프가 있고....... 이런 식으로 단어를 외운 다음, 단어를 떠올릴 때는 상상했던 이미지를 다시 불러냈다. 그리고 이미지 속에서 내가 배치한 물건(단어)들을 찾으면 된다. 장소법을 사용한다면 누구나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장소법은 인지심리학이 소개하고 있는 효과적인 기억술 중 하나다.  Maguire는 영국에서 매년 개최되는 기억력 대회( World Memory Championships ) 우승자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10명 중 9명이 장소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공간 학습 전략이 장소법의 중요한 요소라고 결론지었다.[각주:1]


“The Nature of Thought”이라는 책은 장소법이 효과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장소법은 확실히 공간적이다. 참가자들은 이 전략을 이용해서 단어들을 특정 공간,장소적 문맥 안에 집어넣는다. 단어를 인출하려면 장소들을 머리 속에서 둘러보면 된다. [...] 개별적인 문맥에서 일어나는 사건(단어)일지라도 이 방법을 이용하면 맥락 간 차이에서 오는 혼란을 줄일 수 있고, 사건들 또한 유사해진다. 우리가 고향, 이웃, 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심적 지도는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는 공간적 맥락의 대표적 예이며, 내부적으로 부호화할 수 있고, 따라서 효과적으로 인출하거나 회상할 수 있다. Smith, Glenberg, Bjork(1978)나 Bellezza, Reddy(1978)의 연구는 장소법의 위력이 이런 ‘일상의' 이점을 빌리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


나는 13개를 맞춘 여학생과도 대화를 나누어봤다.  

“저는 단어를 이미지로 연상해서 외웠어요.”

“실은 저도 그렇게 외웠거든요.”


그 여학생 역시 장소법과 비슷한 전략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똑똑한 여학생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살짝 웃었다. 



  1. Routes to remembering: The brains behind superior memory. Maguire, Eleanor A.; Valentine, Elizabeth R.; Wilding, John M.; Kapur, Narinder Nature Neuroscience, Vol 6(1), Jan 2003, 90-9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