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루소 - 꿈
Posted by 인지심리 매니아
스토리가 이어지는 꿈
살
면서 꿈을 꿔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꿈은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지만 우리 대부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가 꾼 꿈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잠깐 생각해 볼 때도 있지만, 이내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잊어버린다. 우리는 꿈을 하찮게 여기며
살아간다.
그
렇다면 지금부터 재미있는 사고 실험을 해보자. 만약 당신이 어느 날 새벽 가수가 되는 꿈을 꿨다고 가정해보자. 아침에 일어난
당신은 그저 꿈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스토리가 이어지는 꿈을 또 꾸었다고
생각해보자. 꿈 속에서 당신은 자신이 어제 꿈에서 가수가 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꿈 속에선 공중파 방송사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다음날 꿈 역시 스토리가 이어진다. 당신은 어제 꿈에서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사실을 기억한다. 당신은 꿈에서 자신의 트위터에
수많은 댓글이 달린 것을 확인한다. 이럴 수가.... 어제 프로그램에서 당신이 출연한 사실 때문에 소셜 네트워트가 폭주한 것이다.
만
약 이렇게 꿈이 며칠, 아니 몇 년 동안 일관성 있는 스토리로 계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부터 우리는 꿈이 자신의 실제 삶이라고
착각할지 모른다. 우리는 꿈이 실제 삶인지, 실제 삶이 꿈인지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매일같이 가수로서 살아가는 삶을
살다가 잠이 들고, 또 다른 삶에서 깨어나서 평범한 학생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잠이 들면 다시 가수의 삶으로 돌아온다. 마치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꿈에서 또 하나의 '나'라는 자아가 탄생한 것이다.
노경 - 호랑나비
하 지만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꿈에서의 내 삶이 진짜 내 삶이라고 착각하려면, 즉 또 하나의 자아가 탄생하려면 추가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바로 '기억'이다. 가수의 꿈에서 자신이 어제 꿈에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오늘 꿈에서 댓글이 달린 것이 프로그램 출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수'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꿈을 자신의 진짜 자아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스토리가 일관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오늘 꿈에서 지난 꿈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문에 꿈 안에서 일관된 자아를 형성할 수 없는 것이다.
꿈
에 대한 사고실험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바로 기억이 자아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사실이다. 이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내가 오늘 아침에 깨어났는데 어제 일을, 또는 지난 모든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
즉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기억은 자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기억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생활할 수 있다.
그럼, 어떤 기억이 자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할까? 인지심리학은 기억을 여러 종류로 구분하는데, 그 중 자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이 자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전적 기억은 개인적 경험에 관한 일화적 기억을 말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많은 학생들 앞에서 발표를 했던 일,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바닷가로 놀러갔던 일... 이렇듯 시간과 장소라는 맥락에 의존하는
기억이 자전적 기억이다.
기억의 오류
그
런데, 자전적 기억은 실제 일어났던 일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을까? 그건 의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겪었던 일의 대부분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기억에는 오류도 많다. 인간은 때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도 일어났다고 기억하거나,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기억하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성폭행에 관한 기억이다. 미국에서는 한 때
자신이 어렸을 적 부모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소송을 제기해서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전문가로부터
상담을 받던 중 우연찮게 자신이 성폭행 당한 기억을 되살려냈다.
하
지만 이들의 기억이 정확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로프터스(Loftus)는 이들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 용감한
교수다. 로프터스는 1994년 연구에서 한 소년에게 '거짓 기억'을 심는데 성공했다. 5살 때 길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학생에게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고 말해주자, 소년이 사건의 디테일을 하나하나 기억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겪지도 않은 일의 디테일을 어떻게
회상할 수 있단 말인가! 로프터스는 일련의 실험을 진행한 끝에, 인간의 기억은 주위 사람에 의해 '주입'될 수 있으며, 성폭행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기억 역시 상담자의 말에 의해 주입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로프터스는 이 주장을 한 이후 학교를
옮겨야 했으며, 소송에도 시달려야 했다).
* 이와 관련된 논란은 아직도 진행중이며, 더 많은 연구결과가 필요할 것 같다.
기억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한다는 사실은 인지심리 연구를 통해 밝혀진 재공고화(reconsolidation) 현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를
참조하기 바람). 인간의 기억은 장기기억 체계에 저장되어 있다가 인출된다. 그런데, 특정 기억이 인출되는 순간 단단하던 기억이
'물렁물렁'해진다. 따라서 인출되는 순간 기억은 다른 형태로 변화가 용이하고, 기억의 변형이 일어나기도 한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다. 자신이 과거의 일을 회상할 때마다 내용이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것 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겪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된 현상으로 아동기 기억상실현상(childhood
amnesia)과 회고절정(reminiscence bump) 현상을 들 수 있다. 다들 아는 사실이겠지만, 인간은 대체로 5세
이전에 겪었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자신이 엄마 뱃속에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 기억을 한번 의심해 볼
것). 그런가 하면 특정 시기에 겪었던 일을 유난히 잘 기억하는 회고절정 시기도 있다. 회고 절정은 보통 청소년기~초기 성인기에
나타난다. 따라서 나이 들어서 겪었던 일보다는 대학교 1학년때 겪었던 일들이 많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편집된 영화다
기억 연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 기억이 고정불변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기억은 대체로 정확하지만, 다소 왜곡되고, 생략되고, 편집된 기억이다.
이
런 점에서 우리는 '영화 감독'과 유사하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촬영하는 영화감독이다. 우리가 한컷 한컷 찍는 scene(기억)이
우리 영화의 내용(인생 또는 자아)을 결정한다. 우리는 영화 감독인 만큼 우리 영화의 내용을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필름에 담긴 모든 내용들을 그대로 영화로 만들 필요는 없다. 때로는 불필요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scene을 삭제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추가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자
신이 살아왔던 지난날을 한번 돌아보고, 어떤 기억들이 남아있는지 살펴보자. 온통 불쾌하고 나쁜 기억으로 가득차서 자기 자신이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낙담할 필요 없다. 우리 기억은 진실을 완벽하게 반영하지도 않으며,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비참했던 일을 평생 기억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이미 촬영된 필름을 아름답게 편집할 수 있다. 즐거웠지만 잊혀진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고, 우울한 장면을 뽀샵처리해서 밝게 만들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하는 행동에 따라서 영화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영화를 위해서 잘려나간 기억을 찾아보길 바란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주인공 토토는 인생의 중년을 훌쩍 넘긴 뒤에야 수없이 편집된 키스 장면 모음을 모두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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