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인지심리 매니아
가 끔은 세상에 태어나서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한다. 지하철을 나와서 학교 가는 버스를 타면 꼭 하늘을 한번 쳐다본다. 파란 하늘처럼 아름다운 색깔이 없기 때문이다. 비단 이것 뿐만 아니다. 교정들 거닐면 학생들의 웃는 소리,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를 유심히 들어본다. 자세히 들어보면 하나같이 아름답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꽃이 다른 물체와 구분되어 정확하게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참 경이로운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상에 대한 지식은 현상 자체와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색깔이 다. 사실 이 세상에는 색이라는 게 없다. 오직 빛의 파장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특정 파장을 특정 색으로 지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하늘을 쳐다볼 때 아름다운 푸른색을 경험할 수 있다. '파란색'은 우리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표상일 뿐이다.
인간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경험했던 모든 감각들은 우리 머리 속에 저장된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자체를 우리 머리 속에 집어넣을 수 없다. 결국, 학교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일종의 '표상'으로 만들어서 머리에 저장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 머리 속에 그 사람의 얼굴을 직접 집어넣지도 않았는데 기억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의 얼굴을 표상하는 무언가가 머리속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컴퓨터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컴퓨터를 사용할 때, 컴퓨터는 오직 0과 1이라는 정보를 이용해서 정보를 처리한다. 하지만 컴퓨터 화면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출현한다. 네이버 까페 화면이 나타나고, 사진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이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0과 1이라는 정보(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기적 신호일 것이다)를 우리가 지각할 수 있도록 표상으로 변환한 것이다.
우리 머리 속 내적 표상은 세상을 재표현(representation)한다.
표상은 이처럼 대상(물론 대상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럼 여기서 내가 표상을 강조하는 이유는 뭘까?
인간은 외부 환경에서 받은 정보를 토대로 '심적 표상(mental representation)' 을 만들어낸다. 이 심적 표상은 인간이 처리하는 정보의 기본 단위가 된다. 표상은 물체 재인에서 기억, 언어, 고차적인 인지 기능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인지심리학은 인간 마음의 메뉴얼, 특히 인간이 표상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설명해 놓은 메뉴얼이다. 앞으로 글을 써 나가면서 설명하는 모든 주제들이 바로 머리 속 '표상'을 기본단위로 삼을 것이다. 그래서 표상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자신의 일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진짜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뇌가 현실을 토대로 만들어 내는 표상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껴보자. 색깔, 촉감, 말소리, 상상....... 세상에 태어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 사실은 인지심리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더 소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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