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 http://www.child-development-guide.com/
글: 인지심리 매니아
어린이는 왜 말을 빨리 배울까?
요즘 대학생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어학 연수를 많이 간다. 그런데 고민이 된다. 한국에서 영어 공부를 미리 하고 가는 게 좋을까, 그냥 가는 게 좋을까?
Kersten et al(2001)은 성인이라면 사전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굳이 이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 주장이 사실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기본적인 영어 단어도 모른 체 현지에 바로 가면 학습 효율이 떨어진다. 영어 교육을 받지 않은 성인이나 노인들이 현지 언어를 배우는 데 곤란을 겪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설득력 있는 주장처럼 보인다. 반면, 어린이는 사전 교육 없이도 현지 언어를 빠르게 습득한다. 영어 단어를 철저히 공부하고 해외로 나간 대학생들보다 훨씬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걸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그 이유가 뭘까? 성인은 기초 공부를 열심히 하고도 외국어를 간신히 배우는 반면, 왜 어린이는 별 노력 없이 언어를 빠르게 배울까?
Kersten 등은 Newport(1988, 1990)의 “Less is more” 가설을 통해 이 현상을 설명한다. Newport는 어린이의 미숙한 작업 기억 능력이 역설적으로 언어 습득에 도움을 준다고 주장한다. 작업 기억이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어린이는 문장의 일부분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개별 단어나 형태소의 기능에 민감하다. 따라서, 복잡한 뜻의 문장을 만들 때 문장 구성 요소들을 적절히 조합할 수 있다.
반면, 작업 기억이 성숙한 성인은 문장 전체를 처리할 수 있다. 그래서 상황을 설명하는 문장을 통째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렇게 기억하면 개별 단어나 형태소의 기능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문장을 만들 때 실수를 하게 된다.
(예전에 필자는 영어책에서 봤던 문장 “I want you to.....”을 통째로 외웠다가 다른 상황[“I want to”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대로 사용하는 바람에 외국인을 당황하게 만든 적이 있다.)
미국에 처음 간 한국 어린이에게 누군가 개를 가리키며 “A dog runs fast”라고 말했다고 상상해 보자. 어린이는 이 문장 전체를 처리할 능력이 없다. 아이가 오로지 기억하는 건 ‘dog’라는 단어 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dog’라는 단어가 눈 앞에 펼쳐진 상황과 관련 있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만약 며칠 뒤 누군가가 비슷한 생물체를 보고 “what a cute dog....”이라고 말했다면, 아이는 이제 이 생물체의 이름이 ‘dog’라고 확신할 것이다. 지난 번 상황과 비교해 봤을 때 생물체의 움직임이나 속도가 변한 반면(정지해 있다), 생물체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번 문장과 비교했을 때 바뀌지 않은 단어는 ‘dog’ 뿐이다. 따라서 어린이는 ‘dog’가 생물체를 가리키는게 분명하다고 결론짓는다.
반면, 성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성인은 “A dog runs fast”라는 문장 전체를 눈 앞에 보이는 상황과 연결 짓는다. 따라서 어떤 단어가 상황의 어떤 요소를 언급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약 며칠 뒤 누군가가 비슷한 생물체를 보고 “what a cute dog”이라고 한다면 성인은 혼란에 빠진다. 이번 경우 역시 각 단어가 언급하는 바를 모르기 때문이다. 성인은 ‘cute’가 생물체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인지, 생물체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생물체의 귀여운 표정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성인은 어학 공부를 위해 외국에 가기 전 사전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문장의 세부 요소를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만큼, 단어를 외우거나 문법을 익혀서 세부적 요소를 미리 익히는 것이다. 만약 성인이 미국으로 오기 전 ‘dog=개'라는 사실을 공부했다면 ‘cute’는 개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럼 이 단어는 생물체의 움직임 또는 귀여운 표정을 의미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만큼 말을 배우는 속도는 빨라진다.
성인이 어린이의 학습 방법을 따라한다면?
여기서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혹, 성인도 어린이처럼 학습하면 말을 빨리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즉, 어린이처럼 말의 세부 요소에 집중하며 말을 배운다면? Kersten 등(2001)은 이 가설이 참인지 알아보기 위해 실험을 진행했다. 1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에게 일련의 애니메이션을 보여준 뒤, 이 애니메이션의 상황을 설명하는 ‘인공 언어'를 함께 제시했다.
그림 1 : 문장이 표현하는 속성의 유형
그림 2 : 애니메이션 예시
예를 들어, 참가자는 그림 2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는 동시에 스피커를 통해 “geseju elnugop doochatig”라는 문장을 듣는다. 연구자들은 각 요소를 조합하여(물체, 움직이는 방식, 방향) 총 72가지의 상황을 참가자에게 제시했다.
연구자들은 참가자를 두 집단으로 나눈 다음, 문장을 들려주는 방식을 집단마다 다르게 조작했다. 한 집단(Sentence 조건)의 경우 문장 전체를 다 들려줬다. 다른 집단(Individual Word 조건)의 경우 처음에 한 단어씩 들려주다가 점차 긴 문장을 제시했다. 이 경우, 처음에는 ‘object words’만 들려주다가 나중에는 ‘ object+Manner’, ‘object+manner+path’를 들려줬다(즉, 한 단어씩 학습할 수 있게 제시했다).
두 집단 중 누가 인공 언어를 빨리 배웠을까? 분석 결과, Individual Word 조건의 학습자가 개별 단어 테스트, 문장과 알맞는 상황 고르기 테스트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 연구 결과는 문장의 개별 요소에 집중하면 언어를 빨리 익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실험 참가자들이 성인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 연구 결과만 놓고 성인이 어린이의 학습 방식을 모방할 때 언어를 빨리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관련 연구 결과들이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논문 참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사전 학습을 하고 어학 연수를 가는 것이다. 사전학습은 문장의 세부 요소에 민감하지 못한 성인 학습자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원어민과 대화할 때 단어나 문법이 정리되어 있으면, 학습 속도는 그만큼 빨라질 것이다.
- Alan W. Kersten, Julie L. Earles, Less Really Is More for Adults Learning a Miniature Artificial Language, Journal of Memory and Language, Volume 44, Issue 2, February 2001, Pages 250-27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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