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BPS Research Digest

번역: 인지심리 매니아



세계 경제가 암흑기를 벗어나 회복세로 접어들고 있는 요즘, 흥미로운 논무 한편이 게재되었다. 이 논문은 지능이 높은 사람이 경제학자(즉, 시장경제적 사고관) 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고 설명한다. 즉, 이들은 경제에 대해서 낙관적이고, 정부의 개입이 없는 자유시장체제의 이점을 높이 평가하며, 해외무역과 외국인 노동자의 이점을 인정하며, 적은 인력으로 높은 생산성을 구현하는 것을 가치있다고 평가한다. 이 논문의 저자인 Bryan CaplanGeorge Mason 대학의 경제학자다.



기존 연구는 오랜 교육을 받은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경제관이 경제학자들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설명해왔다(pdf). Caplan와 그의 동료 Stephen Miller는 이런 연구들이 지능이라는 요소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지능이 높은 사람일수록 교육기간도 길 뿐더러, 지능이 경제관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저자들은 General Social Survey(GSS, 미국에서 2년마다 시행하는 전국적인 설문조사를 말한다 - 역자 주)의 응답을 분석했다. 이 설문지의 문항 중에는 경제와 관련된 문항뿐 아니라 언어적 아이큐를 묻는 테스트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들은 학력과 경제관의 관계가 지능이라는 요소를 고려하자 약해지는 것을 발견하고 지능이 경제관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고 결론지었다. 물론, 경제관과 지능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이 지능을 바꾸지 못하지만 지능은 교육기간에 영향을 미친다면 지능이 경제관에 미치는 영향력은 교육보다 크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교육이 지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더라도, '지능은 경제관을 예측하는 주요한 요인이다'라고 저자들은 설명했다.



높은 지능과 '시장경제적 사고'간 상관관계는 결국 경제학자들이 옳고 대중이 바보임을 의미할까? 이 질문에 저자들은 예일대 의사결정 전문가인 Shane Frederick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문제에 관해서라면 '지능이 높은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 낫다. 하지만, '사과와 오렌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아인슈타인이 사과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의사결정에 불필요한 정보가 될 것이다.



저 자들은 Frederick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경제학자와 높은 지능의 사람이 유사한 생각을 한다는 사실은 "경제학자가 옳고 대중이 틀렸다"라는 문장을 놓고 일반인과 전문가가 갈라지는 이유를 알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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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lan, B., and Miller, S. (2010). Intelligence makes people think like economists: Evidence from the General Social Survey. Intelligence, 38 (6), 636-647 DOI: 10.1016/j.intell.2010.09.005



출처: Thoughts of Neo Academic

번역: 인지심리 매니아


최근 Loken, Heiberger, Junco는 트위터가 학생들의 수업 참여와 성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 논문을 Computer Assisted Learning저널에 실었다. Junco et al. 은 수업에 트위터를 사용하면 학생 참여도와 학기 성적이 향상된다고 결론내렸다.


이 실험의 설계는 다소 특이하다. 일곱 개의 섹션으로 나누어진 1학점짜리 pre-health 과목이 실험을 위해 선정되었다. 참가자 중 일부는 이 섹션들 중 네 개에 무선으로 할당되고, 나머지 세 개의 섹션에는 통제 집단의 학생이 배정된다. 실험집단의 경우 수업의 일부로 트위터를 사용하게 되고, 통제집단은 사용하지 않는다. 모든 섹션은 칠판이나 WebCT, Moodle같은 일반적인 학습관리 시스템 대신 Ning을 사용했다. 학생들이 조건에 무선적으로 할당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실험은 준실험(quasi-experiment)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실험의 경우 학생 구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연구자는 이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표본의 98%가 18~19세였으며, 여성이 60%, 백인이 91%, 72%가 부모 중 한명이 학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학생의 상세한 정보를 알 수 있고, 특히 어떤 유형의 학생이 트위터의 도움을 더 많이 받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트위터는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을까? 수업이 진행되는 첫 2주 안에 학생들은 1시간 동안 트위터 사용법을 배우게 되고, 학기 동안 트윗을 필수적으로 올려야 했다. 그 다음 주 수업부터 질의문답이 시작되었다. 트위터는 11가지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

  • 수업 토론을 온라인에서 계속하기
  • 질문이 있을 때 올리기
  • 필요한 책에 관해 토론하기
  • 수업 관련 알림을 제공하기
  • 학교 관련 알림을 제공하기
  • 교내 행사와 자원 (학교 교육 센터에 대한 정보 등)에 대한 정보 제공
  • 수업과 관련하여 학생들 간 연결을 돕기
  • service learning 조직하기
  • 스터디 그룹 조직하기
  • 추가적인 과제 올리기(트위터가 꼭 필요함)
  • 필수 과제 올리기(이 역시 트위터가 꼭 필요함)

여기서, 우리는 실험과 관련된 일반적인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즉 추가적인 학습 기회와 트위터를 사용함으로써 발생한 효과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학생들은 추가적인 과제, 추가적인 관심 등을 받았다. 관찰된 결과가 추가적인 기회 제공이 아닌 트위터의 효과로 인한 것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실험 결과 작지만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Mixed ANOVA분석할 때 조건에 nested되어 있는 '섹션 요인'을 분석함으로써 처치 조건과 섞여있는 섹션의 효과를 분리하고자 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실험은 준실험이었다). 연구자들은 처치 집단이 통제 집단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고, 학생 참여도도 트위터를 쓴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높았음을 발견했다.


"학기 평점"의 차이도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이 전체 학기 평점인지 해당 과목의 평점인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이번에도 차이가 발견 되었다 -2.28 VS 2.79. 연구팀은 또 유사 실험을 사용해서 발생할 수 있는 편향을 살펴보기 위해 고등학교 평점을 종속변인으로 하여 관찰해봤다. 통계적으로 중요한 차이는 발견되지 않았고, 따라서 논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실험은 실험자 편향이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연구자들도 결과를 해석하기가 까다롭다고 시인한다. 트위터의 사용이 교수자로 하여금 실험 집단 학생의 참여도를 더 유도해서 학생들의 지각, 참여,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트위터가 열성적인 교육자와 학생 간의 상호작용보다 더 큰 효과가 있을지는 추후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다.


Reference

  1. Junco, R., Heiberger, G., & Loken, E. (2011). The effect of Twitter on college student engagement and grades Journal of Computer Assisted Learning, 27 (2), 119-132 DOI: 10.1111/j.1365-2729.2010.00387.x []

출처: Psychology today

저자: Peter Gray

(a research professor of psychology at Boston College, is a specialist in developmental and evolutionary psychology and author of an introductory textbook, Psychology)

번역: 인지심리 매니아


지난 포스트를 작성하면서 나는 다소 불편함을 느꼈다.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학교는 감옥"이라고 말했다.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학교가 나와 지인들에게 있어서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지인들과 마찬가지로 12년 동안 공교육에 몸 담아왔다. 어머니는 몇 년 동안 공립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셨다. 사랑하는 내 이복 여동생은 공립 학교 교사다. 내 친구들과 사촌들 역시 공립 학교 교사들이다. 어떻게 이 사람들이 - 아이들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도와주는 - 아이들을 옥죄는 시스템에 소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 마지막 게시물에 달린 댓글을 보건데 학교가 감옥같다고 말한 내 발언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 것 같다.


가끔은, 나와 다른 사람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과 상관없이 진실을 말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가 사실을  완곡하게 말하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의 학교는 문자 그대로 감옥이다. 특정 연령이 된 사람은(특히 ~16세) 자신의 가장 좋은 시절을 학교에서 보내도록 법의 규제를 받는다. 학교는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말해주고, 이 명령은 강제적 성격을 띤다. 학생들은 자신이 따라야 하는 규칙에 대해 어떤 반발도 할 수 없다. 감옥은 - 일반적인 정의에 따르면 - 비자발적인 감금이 이루어지고 자유를 제한하는 장소를 말한다.


설사 당신이 학교가 좋은 곳이라고 주장하더라도, 학교가 감옥이 아니라고는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후자를 반박하는 것은 현 상황(강제적 교육 시스템)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감옥이라는 단어가 일반적 정의와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할 수 있다. 진지한 논의를 위해서 이 단어의 정의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규칙을 따르거나 즐겁지 않은 일을 할 때 감옥이라는 단어를 은유로 사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몇몇 성인들은 그들의 직장 또는 결혼생활이 감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예들은 자발적인 행동의 결과이기 때문에 용례에 적합하지 않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강제로 일을 시키거나 원치 않는 결혼을 하는 것은 법에 위배된다. 하지만 아이를 억지로 학교에 보내는 것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에 강제로 보내지 않는 경우가 법에 저촉된다. 결국, 직장이나 결혼생활이 감옥이 될 수 있겠지만 학교는 일반적으로 감옥이다.


또 하나 논의해야 할 용어가 있다. 바로 강요된 교육이다. 감옥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이 단어는 가혹하게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강압적인 교육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강요된 교육환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강압적(compulsory)이라는 단어는 사람에게 어떤 결정권도 주어지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논의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강요된 교육 - 그리고 계속적으로 어린이들을 감금하는 것 - 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나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강요된 교육의 '일곱가지 죄악(seven sins)' 목록을 통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1.연령을 기준으로 한 자유의 억압


내 가치관이나  민주적인 사고방식에 비추어 봤을 때, 특정 이유 없이 누군가로부터 자유를 빼앗는 건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법정에서 누군가가 범죄를 저질렀거나 다른 사람을 심각하게 위협했음을 입증해야 그 사람을 감금할 수 있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단지 그들의 나이 때문에 학교에 감금한다. 이것이 강요된 교육의 가장 뻔뻔한 죄가 될 것이다.



2.수치심과 자만심을 조장


어떤 사람에게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학교는 이제 예전처럼 매를 들지 않지만, 여전히 시험, 평가, 순위를 통해 학생들을 비교한다. 우리는 수치심이나 자존심같은 인간의 감정을 왜곡시켜서 아이들이 공부를 하게끔 만든다. 아이들은 자신의 성적이 또래보다 떨어지면 부끄러워하고, 잘하면 자만심을 갖는다. 수치심은 학생들의 학업 열의를 감소시키고, class clown이 되거나 다른 학생을 괴롭히거나 마약에 손을 대게끔 만든다. 또 A라는 하찮은 성취를 이룬 학생은 거만해지게 되고, 다른 학생들을 무시하고, 민주적 가치와 절차를 무시하게 된다.



3.협동과 배려심 저해


우리는 서로 협력하게끔 디자인 된 지극히 사회적인 존재다. 어린이들은 선천적으로 자신의 친구들을 도와주려고 하며 학교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순위와 등급을 매기는 경쟁 기반 시스템은 학생들로 하여금 협동과 반하게끔 만든다. 한 학생이 친구를 도와줘도 상대방이 속임수를 쓰는 경우가 무척 많다. 남을 돕는 행위는 자기 성적을 떨어뜨리거나 자신의 위치를 격하시키는 등 자신에게 손해를 일으킨다. 학교 안에서 성공하기를 강하게 열망하는 학생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무자비한 성취자로 변한다. 또, 지난 포스트에서 이야기했듯이 (2008년 9월 24일자) 강제적인 연령 분리는 경쟁과 괴롭힘을 조장하고 배려심의 발달을 억제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자신보다 어린 사람과 상호작용하면서 도움과 보살핌을 학습했다. 연령 등급의 학교 제도는 이러한 기회를 빼앗아버린다.



4.개인적 책임과 자기 주도성 발달의 저해


내 블로그의 가장 큰 주제는 어린이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게끔 생물학적으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2008년 7월 16일). 어린이들은 놀이를 하고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기 주변의 사회적, 물리적 세상을 학습한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단계를 밟는다. 아이들을 학교와 성인 감독자에게 맡긴 체 아이들의 시간을 과제물로 채워버린다면, 우리는 아이 스스로 져야할 책임을 박탈하는 것이다. 또, 강요된 교육 체계에서는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만 잘 하면, 모든게 잘 될 거야."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학생은 이런 생각을 가질 때 자신의 학습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그만두게 된다. 학생들은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성공적인 어른이 되기 위한 길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고,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할 필요를 못 느낀다. 만약 그들의 인생이 잘 풀리지 않으면, 학생들은 학교를 원망하게 된다. "학교(또는 부모나 사회)가 나를 버렸기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어."



5.학습을 공포, 혐오, 고역과  연계


학교는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학습과 불안을 연합시킨다. 남들보다 읽기 능력이 다소 부진한 학생은 타인 앞에서 글 읽기를 두려워한다. 시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학생은 불안해 한다. 실패에 대한 공포와 수치심은 막대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나는 통계를 가르치면서 엘리트 대학의 학생 상당수가 수학 공포증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학교에서 수학과 관련해서 받은 모욕이 원인이었다. 한가지 근본적인 심리적 원리는 불안이 학습을 저해한다는 사실이다. 학습은 놀이와 같은 환경에서 최적의 효과를 거두고, 불안은 놀이를 저해한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강압적 교육은 학습을 일로 만들어버린다. 심지어 교사도 학습을 일이라고 말한다. "너는 놀기 전에 너가 할 일을 해야 돼." 결국 아이들에게 선천적으로 내재된 능력인 학습은 수고로 변한다. 가능한 피하고 싶은 일거리가 되는 것이다.



6.비판적 사고의 억제


교육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는 비판적 사고를 장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육자들이 립서비스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비판적 사고를 피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자신의 일일뿐 비판적 사고는 시간낭비라고 배운다. 좋은 성적을 얻으려면, 우리는 선생님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따라야 한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고등학생뿐만 아니라 대학생으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다. 나는 대학에서 비판적 사고를 장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나는 비판적 사고를 장려하는 교수법, 작문법을 개발했고 컨퍼런스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앞으로 이 주제에 관해 포스트 두 개를 더 쓸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 교육 시스템의 가장 큰 동기(motivation)인 등급제도는 교실에서 비판적이고 진솔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걸 방해한다. 우리 교사들이 학생들을 등급 매기는 체계 하에서는, 소수의 학생만이 교사의 생각에 의문을 품거나 비판을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비판을 유도하기 위해 점수를 부여한다면, 그 역시 잘못된 비판을 만들어 낼 것이다.



7.기술, 지식, 사고 방식의 다양성 감소


우리는 모든 학생들에게 동일한 표준 교과 과정을 적용함으로써 대안적인 방법을 모색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학교 교과 과정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하위 기술, 지식을 대변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한정된 지식만 배운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왜 모두가 똑같은 것을 배워야 할까? 아이들은 자유가 주어질 때 - Sudbury Valley School와 기타 unschooler의 예를 보면서 - 새롭고 다양하고 예측 못했던 경로를 찾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만의 관심사에 열정을 보이고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해서 결국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갈 것이다. 학생들에게 강요된 표준적인 교과 과정은 자신만의 관심사를 추구하는 시간을 빼앗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한다. 오직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시행하는 시험뿐이다. 몇몇 학생들은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지만, 대다수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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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죄악' 목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나와 대화했던 많은 교사들이 강요된 교육의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고, 이에 대응하려는 시도도 많이 있었다. 그 중 일부는 교육 시스템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자유로운 분위기와 놀이를 가르쳐주고자 했다. 또 실패에서 오는 수치심이나 불안을 줄이고자 노력했다. 서로 협력하고 돕는 자세를 고양하고자 했다. 또 비판적인 사고를 하도록 독려했다. 하지만 교육 시스템은 이런 노력과 정반대로 돌아간다. 솔직히 말하면, 현 교육 시스템에선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배우는 것보다 선생님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가르치는 게 더 어렵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런 시도를 언제든 그만 둘 수 있다는 점에서 감옥은 아니다.)


사람은, 특히 어린이는, 놀랄 정도로 적응적이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많은 학생들이 강요된 교육에서 오는 부정적 경험을 극복하고 긍정적인 측면에 집중하려고 한다. 그들은 죄악과 싸운다. 그들은 서로 협력할 방법, 놀이를 할 방법, 다른 사람을 돕고 수치심을 극복할 방법, 자만심을 버리는 방법, 괴롭힘에 대항하는 방법,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방법, 자신만의 관심사를 찾는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충족하는 동시에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 실패한다.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과제에 시간을 들여야 하고 학교의 요구에 따라야 하므로, 자기 자신을 위한 교육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나는 오늘 강요된 교육제도의 '일곱 가지 죄악'을 열거했는데, 죄악은 일곱가지로 한정되지 않는다. 일곱 개 이상이 있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학교를 등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스스로 학습할 수 있지만, 어른인 우리들은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 그게 나의 다음 포스트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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