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로 가든 중간만 가면 된다


- 우리 아버지



글 : 인지심리 매니아


필자는 고등학생 시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읽은 적이 있다. 책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덕목이 넘침과 모자람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나이 어린 필자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덕목이란 넘칠수록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즐거움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도덕적 이상을 쫓을수록, 더 많이 배울수록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력에 감탄하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 학식이 타인보다 뛰어난 사람이 더 행복한 것도 아니고, 부자가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즐거움이 지나쳐서 스스로를 망치는 사람도 있었고, 지나치게 착하거나 영리해서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었다. 바람직한 덕목일지라도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아담 그랜트(Adam Grant)와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2011년에 발표한 논문[각주:1]에서 덕목(Virtue)이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비단조적(nonmonotonic)’ 패턴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돈이 행복에 미치는 효과가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성실성 같은 덕목도 동일한 법칙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다. 저자들은 일반인 뿐만 아니라 긍정심리학자들마저 가치있게 여기는 덕목들이 각각 어떤 부작용을 갖고 있는지 나열하고 있다.


지식의 해로움

지식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저자들이 인용한 한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각 기업의 관리팀이 받는 학습 오리엔테이션의 정도와 직무 수행의 관계를 연구했다. 그 결과, 지나치게 집중적인 학습 오리엔테이션의 경우 직무 수행과 부적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비단 기업에서만 이런 부작용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이 많은 학자는 일반인보다 문제를 더 잘 해결하고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까? Tetlock에 의하면, 개방성과 인지적 유연성이 뛰어난 사람은 미래를 예측할 때 발생 확률이 낮은 결과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또,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문제 해결 시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용기(성실성)의 해로움

용기(Courage)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용기와 일맥상통하는 강점 중 하나인 ‘연습(practice)’(저자의 분류에 따르면)을 예로 들어 보자. 연습은 많이 할수록 좋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Langer 등의 연구에 의하면 지나친 연습은 유연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기술 향상을 위한 효율적 방법을 터득하기 힘들 수도 있다.

용기의 또 다른 강점인 ‘성실성(conscientiousness)'도 마찬가지다. 성실성이 지나치면 세부적인 사항에 지나치게 몰두할 위험이 있고, 적절한 시기(예, 노력해도 목표를 이룰 수 없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을 때)에 목표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인간미의 해로움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도 지나치면 좋지 않다. Windsor 등(2008)의 연구에 의하면 자원봉사 시간이 연간 800시간을 초과할 경우 삶의 만족도가 줄어들 수 있다. 저자들은 긴 봉사 시간이 본인에게 짐이 되거나, 봉사 활동으로 인해 다른 의미 있는 일에 투자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추측한다.

공감(Empathy) 능력이 높은 사람은 행복할까? 공감 능력이 지나치면 큰 스트레스를 겪기 쉽고 오히려 친사회적 행동을 할 확률이 줄어든다(Eisenberg, 2000). 타인의 고통에 지나치게 공감하는 사람의 일상을 상상해 보면, 이런 부작용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충성심의 해로움

자기가 속한 집단에 협조하려는 마음도 지나치면 좋지 않다. ‘충성심(Loyalty)’을 예로 들어보자. 충성심이 지나친 직장인들은 조직의 비윤리적인 관행을 묵살하기 쉽다. 또 지나치게 충성스러운 조직은 조직 내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발전에 도움이 되는 갈등조차 피하려고 한다. 



원인

수많은 윤리가와 일반인들이 칭송하던 덕목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이유는 뭘까? 저자는 각 덕목이 비단조적 효과를 갖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덕목 간 충돌

첫 번째 원인은 서로 독립적인 덕목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존 관습을 지키려는 보수성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개방성은 각각 독립적인 덕목이며, 각 덕목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결국 한 가지 덕목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이 덕목과 상충되는 다른 덕목을 지킬 수 없게 되면서 행복 등의 지표가 하강하게 되는 것이다.


긍/부정 효과의 크기와 범위의 차이

두 번째 원인은 한 가지 덕목이 가져오는 긍정과 부정적인 효과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식사량과 즐거움에 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초반에는 식사량에 비례해서 즐거움도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배가 부르기 시작하면 즐거움이 증가하는 속도는 줄어든다. 반면 배가 부르기 시작하면서 느끼는 더부룩함 등 불쾌함은 빠른 속도로 증가한다. 따라서 두 긍-부정적 효과의 합은 비단조적 곡선(특히 뒤집어진 U자 곡선)의 형태를 띄게 된다. (아래 그림은 의사결정 시 대안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이득과 손실이 각각 다른 형태의 곡선을 그리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의사결정의 만족감(이득+손해)은 뒤집어진 U자 곡선 형태를 띄게 된다)


사진 : 논문에서 인용




단일한 비단조적 효과

세 번째 원인은 덕목 자체가 비단조적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 위협(stereotype threat) 연구를 예로 들어보자. 연구자들은 남녀 참가자를 대상으로 고정관념 위협(여자는 수학을 못한다)을 일으킨 다음 수학 문제를 풀게 했다. 실험 결과 고정관념 위협을 받은 여성 참가자는 쉬운 문제를 잘 푼 반면 어려운 문제를 잘 풀지 못했다. 과제 수행에 대한 동기가 상승하면(여성들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 문제를 잘 풀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노력도 증가하지만 주의력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는 상대적으로 잘 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는 관찰 변인인 '주의력의 폭' 자체가 비단조적 패턴을 보이는 경우며, 위와 같은 현상이 덕목 간 충돌이나 긍부정 효과의 크기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시중 서점에 진열된 책이나 매년 쏟아져 나오는 심리학 논문들은 한 가지 덕목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조언을 믿고 그 덕목만을 지나치게 고집하면 부정적인 결말을 맞을 수도 있다. 어쩌면 ‘중용'이라는 단어는 지나쳐도 부작용이 없는 유일한 덕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1. Grant, A. M., & Schwartz, B. (2011). Too Much of a Good Thing The Challenge and Opportunity of the Inverted U. Perspectives on Psychological Science, 6(1), 61-76. [본문으로]





글 : Frontal Cortex (Jonah Lehrer)

번역 : 인지심리 매니아



지난 주, 갤럽이 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진화 관련 설문조사의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는 전국의 과학 교사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전체 성인 중 46%가 “신이 1만년 전에 인간을 현재의 모습으로 창조했다”고 믿고 있었다. 오직 15%만이 신성한 힘의 도움 없이 인간이 진화했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통계 수치의 안정성이다. 갤럽이 30년 전 이 질문을 처음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치는 변하지 않고 있다. 1982년에는 44%의 사람들이 창조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 수치는 2012년과 통계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생물학적 진화를 믿는 미국인은 지난 20년 동안 단 4%만 증가했다.


이런 통계자료는 의문을 낳는다. 어떤 과학적 사실들은 왜 수용되지 않을까? 과학적 근거가 상당히 축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는 이유는 뭘까?


Occidental College의 Andrew Shtulman이 Cognition에 게재한 새 논문[각주:1]은 인간의 완고함을 연구했다. Shtulman이 말했듯이, 인간은 최신 연구 결과들을 자신만의 가설과 동화시킨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직관적 가설을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열이 물질이라고 생각하거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한다. 


이는 과학 교육이 단순히 새 이론을 배우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오히려, 학생들에게 그들의 직관을 버리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과학적 사실과 인간의 직관 사이의 갈등을 알아보기 위해, 연구자는 간단한 테스트를 고안했다. 그는 대학 수준의 과학이나 수학 과목을 이수한 150명의 학부생에게 다양한 과학적 진술문을 읽게 했다. 학생들은 이 진술문이 사실인지 최대한 빠르게 판단을 내려야 했다.


연구자는 학생들에게 직관적으로도 납득이 가고 과학적으로도 참인 사실(“달은 지구 주위를 돈다”)과, 직관에 반하지만 과학적으로 참인 사실(“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을 제시했다.


예상대로, 학생들은 직관에 반하지만 과학적으로 참인 사실을 볼 경우 판단 속도가 느려졌다. 학생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거나, 압력이 열을 만든다거나, 공기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진술을 판단할 때 잠시 멈칫했다. 물론 우리는 이 진술들이 사실임을 알고 있지만, 직관을 억제하는 과정에서 판단 시간이 지연된 것이다.


놀라운 점은 우리가 과학적 개념을 내재화한 후에도 – 대부분의 어른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사실을 인정한다 – 초기에 가졌던 직관을 계속 간직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절대로 잘못된 직관을 버릴 수 없다. 다만, 그것을 억누르는 법을 배울 뿐이다.


Shtulman과 동료들은 이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만약 학생이 자신의 직관과 반하는 과학적 사실을 배울 경우, 직관은 어떻게 될까? 우리의 연구결과는 직관이 과학적 사실로 대체되는 대신 억제될 뿐임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연구는 미국 사람들이 왜 특정 과학 사실을 거부하는지를 보여주는 한편 – 진화론은 우리의 직관이나 종교적 믿음에 반한다 – 머리 안에서 일어나는 학습 과정을 연구한 기존 연구에도 토대를 두고 있다. 어떤 사람이 과학적 지식을 수용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매릴랜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케빈 던바(Kevin Dunbar)는 2003년 연구에서 학부생들에게 크기가 다른 공들이 낙하하는 영상을 보여줬다. 첫 번째 영상에서는 두 공이 동일한 속력으로 낙하하는 장면을 보여줬다. 두 번째 영상에서는 큰 공이 더 빨리 낙하하는 장면을 보여줬다. 이 장면은 갈릴레오의 유명한 실험을 재구성한 것이다. 갈릴레오는 피사의 사탑에서 크기가 각각 다른 두 개의 포탄을 떨어뜨렸다. 두 포탄은 동일한 속력으로 착지했다. 이는 무거운 물체가 더 빨리 낙하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던바는 학생들에게 중력을 정확히 묘사한 영상을 고르라고 지시했다. 물리학 지식이 없는 학부생들은 갈릴레오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들은 두 공이 똑같은 속도로 낙하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그들은 직관적으로 아리스토텔리안이다). fMRI 관찰을 한 결과, 비-물리학 전공자가 과학적으로 사실인 영상을 볼 경우 뇌에서 특정 패턴의 활성화가 일어났다. 뇌의 중앙에 위치한 전대상회(anterior cingulated cortex)가 활성화된 것이다. 전대상회는 오류나 모순을 지각할 때 활성화된다. – 신경과학자들은 이 부분을 “Oh shit” circuit이라고 부른다 – 우리는 영상을 보면서 그것이 과학적으로 사실이라고 인정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참가자가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 그래서 던바는 물리학 전공자도 실험에 참여시켰다. 전공자들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갈릴레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전공자들이 과학적 사실을 믿는 것은 뇌의 특정 부위와 관련 있었다. 과학적으로 옳은 영상을 볼 때, 참가자의 DLPFC(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 영역이 활성화되었다. DLPFC는 이마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젊은 성인의 뇌에서 가장 늦게 발달하는 부위다. 이 부위는 원치 않는 표상을 억제하거나 필요하지 않은 생각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당신이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생각하고 싶지 않거나 지루한 일에 집중하려면, 당신의 DLPFC가 일을 해야 한다. 


던바에 의하면, 물리학 전공자들의 뇌에서 DLPFC가 활성화된 이유는 그들이 직관(아리스토텔리안식 사고방식)을 억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만약, 물리학 법칙들이 우리 직관과 잘 들어맞는다면 – 진화론이 틀렸고 살아있는 생물체는 무선적 변이로 진화하지 않았다면 - 참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은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사실로 가득하다. 그래서 올바른 과학적 사실을 믿는 것은 힘든 일이다.


물론, 추가적인 정신적 노력이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그들은 이것을 인지 부조화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주류가 되기까지는 수백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현재의 속도를 비추어 볼 때, 미국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수용되려면 지동설만큼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1. Andrew Shtulman, Joshua Valcarcel, Scientific knowledge suppresses but does not supplant earlier intuitions, Cognition, Volume 124, Issue 2, August 2012, Pages 209-215, ISSN 0010-0277, 10.1016/j.cognition.2012.04.00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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