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과학 진리를 논하다

저자
사이토 나루야 지음
출판사
운주사 | 2012-02-17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과학과 종교의 경계를 넘어선 대론을 담은 『불교와 과학 진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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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인지심리 매니아


명상과 관련된 연구들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불교는 참으로 과학적인 종교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인지적 과정을 비교적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을 발전시킨 점이 그렇다. 불교가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시킨 수행법이 과학적으로 검증될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의 논리적, 과학적 자세 역시 과학적 종교라고 불릴 만 하다. 종전의 교리를 반드시 고집하지 않고 타당한 논리를 받아들이는 자세, 다른 학문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을 도모하는 자세는 논리적 생각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이론을 수정하는 과학계를 닮았다. 부처 역시 이런 말을 남겼다. 


“절대적 권위를 가진 명망 있는 사람이 말했다고 해서, 옛날부터 전승되어 왔다고 해서 진리라고 할 수 없다. 먼저 깊이 숙고하라. 그것이 이치에 맞는지를, 그리고 그들의 주장이 모든 사람들의 무지와 욕망을 제거하고 해탈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인지를, 그러면 나는 그것을 진리라고 승인한다. 설령 내가 말했다고 해서 진리라고 결정짓지 말라. 나의 말도 의심하고 헤아려 보아라.”


이번에 출간된 ‘불교와 과학, 진리를 논하다' 는 논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과학과 교류하려는 불교계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생물학자인 사이토 나루야와 불교학자인 사사키 시즈카는 각각의 주제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책 후반부에는 두 학자가 직접 대화하면서 종교와 과학의 공통 분모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사사키는 이 책에서 불교의 세계관이 ‘자연과학적 세계관'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불교는 만물이 절대자의 섭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인과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비록 불교가 중력의 법칙이나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자연 법칙은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전혀 이상하지 않다. 불교는 자연이 엄밀한 법칙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불교는 인간의 마음을 정밀하게 분석했다고 말한다. 사사키가 설명한 ‘아비달마'가 대표적인 예다.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아비달마는 거대한 ‘심리학 백과사전'처럼 보인다.


사사키가 설명한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에 의하면, 인간은 여섯 개의 식, 즉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감각들이 활성화될 때 심소, 즉 정신작용이 일어난다. 그래서 싫어하는 대상을 만났을 때(식이 활성화된다) ‘증오'라는 심소가 활성화된다.  하지만 수행을 통해 번뇌를 일으키는 심소를 차단하면 이런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


인지심리학에도 이와 유사한 이론이 존재하는데,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주장한 신체적 표지 이론(Somatic Marker Theory)이 그것이다. 다마지오는 특정 자극이 신체적 반응과 반복적으로 연합될 경우, 자극의 제시가 곧 생리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했다. 이 생리적 반응은 정서적, 무의식적이며 인간이 복잡한 의사결정을 할 때 중요한 정보로 사용된다. 아비달마의 주장과 비교해 보면, 자극이 여섯 개의 식을 자극하여 생리적 반응을 일으키고, 이 생리적 반응이 심소 자체가 되거나 심소를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두 분야가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과정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수천년 전 스님들의 지식이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와 비교할 때 손색이 없다는 점은 무척 놀랍다. 


그 동안 우리는 불교가 비논리적, 비과학적 종교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 불교는 논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발전한 종교다. 따라서 불교가 주는 지혜를 무조건 경시하지 말고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또, 저자의 말처럼 불교 역시 원시 불교의 엄밀한 논리적 사고를 도모해서 현대 과학적 사고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글: 인지심리 매니아

어느 날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한 여학생을 발견했다. 무심코 지나쳐서 신호등을 건넌 다음 10분쯤 더 달리다가,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해서 방향을 돌렸다. 좀전에 지나쳤던 신호등에 다시 도착했을 때 여학생은 사라지고 없었다.

텅빈 정류장을 지나치면서 갑자기 묘한 느낌을 받았다. 짧은 시간이 경과했을 뿐인데 방금 전 정류장에 서 있던 사람이 사라지고 없다. 너무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느낌을 받은 이유는 현상의 변화무쌍함 때문이었다. 시간이라는 태엽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변화하거나 소멸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위를 둘러싼 환경은 그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이 없다. 우리는 영화 '큐브'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처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계속 변화하며 늙는다고 설명했다.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은 아닛짜(무상)라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둑카(고, 苦)에 싫어함을 갖나니

오직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 법구경 277 -


사람들은 현상이 무상함을 알지 못하고 영원하다고 착각함으로써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사실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말 '무상'이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할까? 정말 만물이 영원하다고 생각할까?

만약 사람들이 현상을 영구적이라고 믿는다면, 현상이 출현해서 소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할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가설을 검증코자 성균관대 인지심리학 동아리 '심리학의 꽃' 학생들과 페이스북 인맥들에게 짧은 설문지를 배포하는 엉터리 실험을 진행했다.

설문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 철근 콘크리트 건물 수명

2. 음식점의 평균 수명

3. 푸들의 평균 수명

4. 중소제조업의 평균 수명

5. 대기업의 평균 수명

6. 직장인의 평균 이직 주기

7. 결혼 후 이혼까지의 평균 동거 년수


만약 사람들이 현상을 영구적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면, 현상의 지속기간을 과대평가할 것이다. 따라서 참가자의 응답은 정답에서 +방향으로 벗어난 분포를 보일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작성한 설문지를 회수한 다음, 분석을 위해 각 문항의 편차 점수(응답-정답)를 구하고 One-sample t 검증(검증값=0)을 해 봤다. 문항별 분석 결과는 아래와 같다.



  N
편차 평균
표준 편차
t
 유의확률
 콘크리트 건물
 12  -8.0833  18.54948  -1.51  .159
 음식점  11  2.1364  2.0505  3.456  .006
 푸들  13  -2.2308  3.56263  -2.258  .043
 중소기업  12  -2.8833  5.24765  -1.903  .083
 대기업  12  2.15  14.47961  .514  .617
 이직주기  12  2.25  1.71226  4.552  .001
 결혼~이혼  12  -1.8333  11.59807  -.548  .595



평균 0에서 벗어나 있는 문항은 3개 문항이었으며, 그 중 두 문항의 편차 점수가 양수였다. 결국 음식점과 이직주기를 제외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정답을 잘 맞췄거나 오히려 과소평가했다.

그 다음 문항간 분석을 위해 각 문항의 편차 평균을 대상으로 T-test를 실시했다. 그 결과 평균은 -1.21, t=-.848, p=.429였다. 즉, 전체 문항들을 분석했을 때도 편차는 0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즉, 사람들의 응답이 대체적으로 정답에 근접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상의 지속기간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실험에 몇 가지 문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먼저, 가설이 논리적으로 타당한지 의문이다. 두번째로, '현상'이라는 개념이 워낙 광범위해서 실험에 사용한 문항만으로 포착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는 실험법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의 반응을 단순히 기술했다는 한계가 있다.

실험 결과를 놓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쩌면 부처의 말처럼 우리는 무상이라는 개념에 무지할지 모르고, 이렇게 간단한 설문지만으로는 그런 무지를 포착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누군가 좀 더 정교한 실험을 한다면,  '무상'이라는 깨달음을 방해하는 인지적 편향이 우리 안에 있음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글: 인지심리 매니아


필자는 코이케 류노스케의 책들을 즐겨 읽는다. 불교의 이론들을 일반인이 알기 쉽게 풀어썼다는 점, 저자가 필자와 나이는 비슷하지만 훨씬 깊은 생각을 가진 점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저서라면 빠짐없이 읽어 본다. 평소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코이케 류노스케의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만화로 가득한 '번뇌 리셋'을 읽기도 했다.  가벼운 그림 속에 깊은 뜻이 담겨 있어서 진지하게 읽어나갔던 기억이 있다.

최근 그의 저서 '생각 버리기 연습'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일상에서 생각을 버리는 연습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용적 가치가 매우 크다. 하지만 인지심리를 공부하는 사람은 또다른 이유로 이 책에 주목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케가야 유우지'와의 대화편 때문이다. 스님과 뇌과학자의 대화는 동양의 거대한 지혜와 인지과학이 만난 작은 사건이다. 달라이 라마가 과학자들을 초대했던 사건 이래 불교와 과학이 교류를 시작했고, 이 두 사람의 대화 역시 그러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불교와 과학의 랑데뷰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인지심리 매니아 역시 이런 랑데뷰에 참여하기로 했다. '생각 버리기 연습'에서 코이케 류노스케가 했던 말들을 인지심리 연구와 비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불교와 인지심리 연구를 연결할 정도로 뛰어난 학식은 없지만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어보고자 노력했다.



念力, 定力과 인지심리학


'생각 버리기 연습' 29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쓸데없는 생각을 깨닫는 힘을 불교에서는 '염력(念力)'이라 부른다. 염이란, 알아차리는 능력, 즉 '의식의 센서'이다. 이 센서가 민감하면 민감할수록 아주 작은 변화까지도 알아차릴 수 있다. 변화를 알아차린 뒤에 마음의 작용을 바꾸는 힘을 '정력(定力)'이라 한다. 이 힘은 곧 '집중력'으로, 의식을 조절해 하나의 장소에 모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이 아주 빠른 속도로 흩어져 여기저기로 달려가는 것을 끌어 모아 한 곳으로 가도록 정해주는 것이다.


즉, 쓸데없는 생각을 의식의 센서로 알아차리고, 주의를 통해 의식을 다시 한 곳으로 모은다는 것이다. 불교의 이런 주장은 심리학적으로 근거가 있으며, 과연 실현 가능한 이야기일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심리학에도 불교의 염력, 정력과 유사한 개념을 있기는 하다. 위 문장을 읽던 필자의 머리 속에서 Wegner라는 학자가 순간 떠올랐다. Wegner는 자기 통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인지 과정이 작동한다고 주장했다[각주:1]. Monitoring process는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을 감시하는 인지과정이다. 만약 Monitoring process를 통해 자신이 목표와 일치하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즐 쓸데없는)을 인식하면, Operation process를 통해 이를 바로 잡는다. 즉, Operation process는 자신의 상태를 원하는 상태로 조절하는 인지과정이다. 그런데 Wegner가 주장한 두 가지 인지과정이 우연하게도 불교의 이론과 유사해 보인다. Monitoring process는 '염력', Operation process는 '정력'과 유사해 보이지 않는가?
Wegner 이후의 연구는 인간의 뇌에서 실제로 자신의 상태를 감시하고 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컨트롤하는 인지과정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Botvinick, Braver, Barch, Carter, & Cohen, 2001, Holroyd & Coles, 2002).  결국 불교의 이론은 과학적으로도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생각 버리기 연습'의 저자는 쓸데없는 생각을 알아차리고 이를 바로 잡는 능력이 연습에 의해 향상된다고 주장한다. 맞다. 우리는 주위에서 명상을 통해 이런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해 보면 잘 되지 않는다. 정말 명상을 하면 스님처럼 자신의 생각을 맑은 거울처럼 반영하고 이를 옳은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을까?

이전 심리학 연구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회의적인 것 같다. 어떤 생각이 잘못되거나 쓸데없음을 알아차리고 이를 억누르거나 다른 생각을 하고자 노력하면, 오히려 무시하려는 생각이 튀어오르는 역효과가 나타난다. Wegner는 이를 Ironic process theory에서 역설했다. Wegner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 쓸데없는 생각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주장은 모순에 가깝다. 예를 들어 누군가 게임을 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공부에 집중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게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무시하기 위해선 먼저 자신이 게임에 관한 생각을 한다고 인식한 후(Monitoring), 이를 억누르거나 공부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Operation).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게임 생각을 억누르려면 공부하다가 이따금씩 '내가 게임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감시(monitoring) 해야 한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방금 앞 문장에서 그 사람은 게임 생각을 감시하려고 하는 찰나에 이미 게임 생각을 하는 모순에 빠진다. "내가 혹시 게임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생각하면 이미 게임 생각을 한 게 아닌가?!

자기 통제 능력은 한계가 있다는 문제도 있다. Inzlicht et al(2007)[각주:2]은 참가자들에게 영화를 보는 동안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도록 지시했다(아마 슬픈 내용의 다큐멘터리였던 것 같다).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려면 자기 통제가 필요하다.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자기 통제에 힘을 다 써 버리면, 그 다음엔 힘이 남아 있지 않아서 생각을 컨트롤 하기 힘들 것이라는 가정을 세웠다.

결과는 연구자들의 예상대로였다. 자신의 생각이 목표와 벗어나있음을 알아차릴 때는 전대상회에서 ERN(Error related negativity)이라는 뇌파가 발생한다(Wegner의 Monitoring Process와 관련있어 보인다). 그런데, 영화를 보며 자신의 감정을 통제했던 참가자들은 스트룹 테스트를 할 때 ERN 발생이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스트룹 테스트에 반응하는 반응시간 역시 느려졌다.

반응시간

(왼쪽이 자기 감정을 통제했던 집단이다. 반응시간이 통제집단보다 느리다)


ERN

(점선이 감정을 통제했던 집단이다. 70~80ms에서 발생하는 ERN의 진폭이 통제집단보다 줄어들었다).


종합해보면, 생각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경우 자기 통제에 필요한 힘이 점점 소진되서 통제가 불가능해진다. 게다가 Wegner의 주장이 맞다면 억누르는 생각은 더 튀어오를 뿐이다. 그렇다면 명상으로 생각을 통제하는 연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잡생각이 무섭게 튀어오르기 시작하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점 더 심해질 뿐이다. 그럼, 생각 버리기는 결국 불가능한 것일까?


그런데 최근 연구들은 불교식 수행 방법이 주의력을 높인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존 연구들의 기본 전제는 자기 통제에 필요한 힘(주의력도 포함된다)이 '한정된 자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연습한다고 크게 늘어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생각 버리기 연습이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마치 근육 운동과 같다. 처음에는 아령을 1세트만 들어도 지쳐서 더 이상 들지 못한다. 하지만 연습하면 2세트가 가능해진다. 생각 버리기 연습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15분만에 잡생각이 떠오르고 ERN의 감소와 함께 통제 능력이 상실될 수 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내 주의력 근육은 성장한다. 물론 잡생각은 여전히 떠오르고 나중에는 통제가 불가능해 지지만 이번엔 20분을 집중할 수 있다.

심리학계에서는 동양식 주의 훈련 방법을 Attention state training(AST)라고 정의하고 이 훈련 방식의 효과를 연구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연구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서양식 주의력 훈련(AT)보다 효과가 뛰어났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AST 개관 논문을 소개한 이전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2011/07/31 - [인지심리학/주의] - 주의력 훈련의 연구 동향


진리는 아무나 깨닫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코이케 류노스케는 참 대단한 것 같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는 힘이 강한 것 같다. 필자는 아직 이 정도의 내공이 있지도 않고, 생각을 버리는 능력이 연습으로 습득된다는 사실마저 의심스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심리학 연구는 불교식 수행 방법의 효과를 조심스럽게 밝히고 있다. 최소한 연습을 통해 생각을 버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조심스레 해 본다.






  1. Wegner, D. M. (1994), "Ironic Processes of Mental Control", Psychological Review 101 (1): 34–52, doi:10.1037/0033-295X.101.1.34, PMID 8121959. [본문으로]
  2. Michael Inzlicht, Jennifer N. Gutsell, Running on Empty Neural Signals for Self-Control Failure, PSYCHOLOGICAL SCIENCE, 2007 [본문으로]

출처: Your wise brain(릭 핸슨: '붓다 브레인'의 저자)

번역: 인지심리 매니아


우리 조상의 뇌는 생존을 위해 공포에 민감하도록 진화했으며, 그 결과 지속적인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 내부의 작은 속삭임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문제점이 없는지 전전긍긍하게 된다.


이 조심성과 불안은 자동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불안을 겪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긴장하고 있다면 자신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자, 당신의 몸이 어떻게 경직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주위 환경이나 다른 사람을 너무 주의깊게 관찰(경계)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또 몸을 완전히 이완하고 모든 걸 내려놓기 힘들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사무실이나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지나친 경계를 풀고 자신이 안전함을 인식해보자. 아니면 집에서 5분 정도 앉아서 방어적인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만들고 평화롭게 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걸 힘들어 한다.


불안해 하는 뇌는 원숭이가 자신에게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미지의 대상을 경계할 때 적합하다. 그러나 이런 삶은 힘들다. 불안은 삶의 질을 낮추고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든다.


더 나쁜 점은, 이런 성향이 거짓말을 한다는 점이다.

공포의 속삭임은 당신에게 "조심해. 보이지는 않지만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어. 모든 게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 절대로 경계를 늦춰선 안돼'라고 암시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주의깊게 관찰해보라. 당신은 괜찮다. 어느 누구도 당신을 공격하지 않으며, 당신은 익사하지도 않는다. 폭탄이 떨어지지도 않고, 위기도 없다. 설사 상황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당신은 지금 괜찮다.


우리는 미래를 생각할 때 항상 걱정하며 계획을 짠다. 우리는 과거를 생각할 때 후회를 한다. 공포는 미래와 과거를 섞어서 심적 융단을 짠다.현재의 찰나를 다시한번 관찰해보자.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무사한가? 당신의 호흡은 무사한가? 당신의 맥박은 무사한가? 마음은 온전한가? 아마 대답은 '네'일 것이다.


우리는 일생상활에서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런 'alrightiness'를 경험할 수 있다. 진짜로 닥친 위협이나 문제를 무시하거나 모든 게 잘 된다는 합리화를 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당신은 매사에 당신이 괜찮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어떻게 하면 편안한 마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루에 여러번 당신이 괜찮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당신은 보다 많은 돈을 벌거나 사랑을 원할 수도 있고, 짠 감자튀김이 먹고 싶을 수도 있다. 아니면 마음의 고통이 수그러들거나, 교통 체증이 풀렸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모두 정당한 욕구다. 그러나 이같은 고통과 욕망 속에서도 당신은 무사하다. 당신의 일생상활은 현재 살아있음과 이 시각 내가 괜찮다는 자각을 기본으로 한다.


접시를 닦으면서 "나는 지금 괜찮아"라는 사실을 느껴보자. 또는 운전을 하면서 "나는 괜찮다"라고 해도 좋다. 또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지금 괜찮다"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메일을 보내거나 아이를 재우면서도 "나는 괜찮다"라고 생각해도 좋다.


지금 현재 괜찮다는 느낌을 받는 동안에도 여전히 문제와 부딪힐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무사하다고 걱정을 버리면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공포는 사실 근거가 없다. 이런 걱정 역시 잠재워버리자. 당신은 지금 현재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다.


가끔은 정말로 괜찮지 않을 때도 있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몸이 안 좋을 수도 있고, 마음이 심란할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폭풍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현재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마치 바다 위를 휩쓸고 있는 허리케인으로부터 50피트 밑에 있는 조용한 장소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이 현재 괜찮다는 것은 우주적 의식이라든지, 예쁜 장막으로 당신의 삶에 긍정적 태도를 입히라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단순하지만 심오한 사실을 알고 있으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괜찮다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에 몸이 실제 어떻게 느끼는지 느껴보고, 자신의 호흡과 상태가 무사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당신에게 아무리 나쁜 일이 일어나도 내 마음은 문제 없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런 '괜찮아'라는 감각을 익히면 자신의 삶과 뇌와 자아를 건강하게 영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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